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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희가 만난 무대 위의 사람들 <19> 우리 시대 광대 홍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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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10-21 13:20 조회1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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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희가 만난 무대 위의 사람들 <19> 우리 시대 광대 홍순연

극단 자갈치 대표 … “무대 인생 30년, 한순간도 세상에 눈 뗀 적 없어”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10-20 18:57:25
  •  |  본지 21면

 

-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수석 입학생
- ‘성주풀이’ 부른 인연으로 소리패 활동
- 1989년부터 쉼 없이 무대 위에 올라
- 아이 뒷바라지에 유일한 공백 기간도
- 서울·여수 등 명인 찾아가 소리 배워

- 철거지역 아이들·형제복지원 이야기 등
- 소외된 사람 삶·애환 담는 작업 공들여
- 낭독극·옴니버스 등 다양한 연극 시도
- 극단 대표 맡은 7년간 작은 변화 눈길

광대가 빚어내는 소리와 몸짓에는 삶의 애환과 희망이 깃들어 있다. 관객은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위로와 정화의 세계를 경험한다. “우뚝! 그이가 서면 작은 판은 큰 판이 되고, 큰 판은 더할 데 없는 그이의 소리로 맞춤이 됩니다. 영남의 소리, 이름 없는 민중의 소리가 그이에게 온전합니다.”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 김상화 집행위원장의 평가다. 우리 시대의 광대 홍순연의 예인정신과 예술세계를 이토록 명징하게 표현한 글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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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연 대표가 지난 15~19일 극단 자갈치 신명천지소극장(금정구 부곡동 조기종치과 지하)에서 열린 통일줄굿 ‘피리 부는 사나이’에서 사용한 소품을 앞에 두고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성효 전문기자kimsh@kookje.co.kr
광대는 광대무변의 줄임말이다. “그만큼 받아들일 것도 풀어야 할 것도 많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그 속에 정작 자신은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광대는 허투루 쓰기에 송구한 표현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낮추어 ‘딴따라’라 했다.

■수석 입학생, ‘성주풀이’가 인생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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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중인 홍순연 대표.
기찻길 옆 어려운 살림에도 공부를 잘해서 부산대 정치외교학과에 수석 입학했다. 꿈꾸던 학과에 진학한 전도유망한 청년은 어쩌다 딴따라가 되었을까. “1980년대 특유의 사회 분위기가 있었어요. 대학도 마찬가지였죠. 그 때문인지 신구대면식에서 김세레나의 성주풀이를 불렀습니다.” 곧바로 민요연구회 한소리패에 들어가게 됐지만 애초부터 예술가가 되려고 작심했던 바도 아닌데 사소한 우연이 어떻게 30년이나 이어졌을까. “처음에는 사람이 좋았어요. 함께 어울려 소리도 배우고 돈도 없으면서 술도 많이 마셨습니다. 결국 이 길을 가야겠다 결심한 계기는 공연이었습니다. 학내공연과 농촌 봉사활동 문화선전대 공연을 하는 동안 내가 지금 무엇인가 하고 있구나 하는 뿌듯함을 느꼈고, 그 감정이 가슴에 차곡차곡 쌓였던 것 같아요.”첫 작품은 신발공장 노동자 이야기를 다룬 연극 ‘민주꽃신바람’이다. 대학 3학년 겨울, 극단 자갈치의 탈춤·민요 강습회에 강사로 참가한 일이 인연이 됐다. “줄곧 대중 앞에서 공연을 했어도 연기는 처음이라 힘들었어요. 많이 울었습니다. 자세히 가르쳐주는데도 이해가 안 됐어요. ‘영축산 들배지기’에서는 국밥집 아지매 역할을 맡았는데 ‘작년 이맘때 봤다 아임니까’라는 짧은 대사를 30분 넘게 반복하고 또 반복했습니다.” 서너 작품을 하고 나니 겨우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대사는 그냥 뱉어내는 것이 아니라 스물셋 꽃다운 여학생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미세한 감정까지 오롯이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살아있는 대사가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2만 명 호령하던 목소리… 소리를 배우다

1989년부터 1996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무대에 올랐다. 2001년부터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는 왜 작품이 없을까. “애들 키웠지요. 엄마 손이 없으면 안 되는 시기가 있으니까요.” 아이들 뒷바라지만 한 것은 아니었다. 마음에 품고 있던 공부를 시작했다. 소리였다. 한소리패에서 모심기 노래, 밭매는 소리 등 일노래를 주로 배우고 불렀는데 소리를 제대로 배우고 싶은 마음이 늘 간절했다. 막상 그 일을 시작하니 그제야 목 상태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교에서 행사하면 2만 명이 모이는데 그 넓은 광장에서 마이크도 없이 공연하려면 목소리가 아주 커야 했습니다. 얼마나 목청껏 소리를 질렀던지 제 별명이 ‘우람이’었어요.” 시쳇말로 ‘목이 간’ 상태라 소리를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오기가 생겼다. 노력하면 안 될 것이 있겠냐며 동래학춤 구음 명인 유금선 선생을 찾아갔다. “낭랑한 소리예요. 그분께 발성과 째(발성과 장단을 넘나드는 목구성)를 배우면서 목을 살살 달래가며 맑은 소리를 내는 훈련을 하니 신통하게도 목이 돌아왔습니다. 고음도 자연스레 되고요. 그 뒤부터 섣불리 ‘안 돼’라는 단정은 삼가게 됐습니다.”

연기는 공동 작업이라 끝나면 즐겁고, 소리는 고독해도 하는 동안 즐겁다 한다.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광대의 무게를 소리로 풀어낼 수 있었던지 소리의 매력을 ‘시원하다’고 표현했다. 여수의 김영옥 선생에게 심청가, 서울 성우향 선생에게 춘향가를 사사했으나 소리를 끝까지 하지는 못했다.

탈춤은 채희완 선생에게 배웠다. 소리와 춤, 연기는 각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동되고 확장된다. 극단 자갈치가 지향하는 가치를 표현하는 데도 맞닿아 있다. 자갈치는 사람 사는 세상의 질박함, 소외된 사람의 삶과 애환을 전통예술과 연행으로 풀어내는 단체다. 1986년에 창단되었으니 올해로 무려 33년째다. “오늘에서 옛것을, 옛것에서 오늘을 재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젊은 세대와 현대 관객, 지금 이 시대와 공감하고 소통해 나가는 방법을 늘 고민하지요.”

■30년 광대 인생… 예술은 소박하다

그가 극단 대표를 맡은 최근 7년간 자갈치에는 아기자기한 변화가 있었다. 철거지역 아이들 이야기 ‘돛 달린 나무’는 폴란드 아동 문학가의 작품을 소재로 했다. 자갈치 사상 최초의 번역극이다. 1987년 작품 ‘복지에서 성지로’의 후속작도 제작했다. 형제복지원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뒷이야기를 소재로 했다. 낭독극 형식의 ‘신 수궁전’과 4명의 광대가 각자의 장기를 옴니버스식으로 보여주는 ‘광대열전’은 새로운 시도였다. “젊었을 때라면 못해냈을 텐데 지금은 아이도 다 커서 자갈치에 올인할 수 있어 좋습니다. 도와주시는 많은 분 덕분에 제가 해 보고 싶었던 기획을 다 해본 것 같아요. 후배를 위해 할 일도 많고 내가 좀 받쳐줘야 하는데….”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을 다 내어줄 수도 있는데, 이즈음 젊은 배우들이 서울로만 향하는 모습은 못내 안타깝다. “넓은 세상, 새로운 것도 좋지만 지역에서 역사와 전통을 지키는 일도 중요합니다.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방식이 프로젝트에 집중되어 있고 시스템에 대한 지원은 턱없이 부족해요. 좋은 콘텐츠도 필요하지만, 시스템은 문화의 큰 힘이 되고 크게 나눌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내 청춘 파도에 싣고’를 공연할 때 피해자인 원양어선 선원을 직접 만나 현장을 취재하고 증언을 채록했어요. 작가는 글만 쓰고 배우는 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의 실체를 함께 이해하는 작업이죠. 프로젝트형에서는 이런 과정까지 담기 쉽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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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에 살면서도 한 번도 세상에서 눈을 뗀 적이 없다. 학창 시절의 트라우마인지 경찰을 보면 여전히 두렵다고 하면서도 세상의 불합리와 부당한 권력에 쓴소리를 멈추지 않는 그에게 예술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스냅 사진처럼 한순간이라도 기억에 남는 것 아닐까요. 그때 그 소리, 그때 그 사람. 그거 하나면 충분하지요.” 거창한 질문에 소박한 답이었다.

공연기획자·부산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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