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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전동 : 1999-2004, 공백, 2009-2011_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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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2,071회 작성일 18-06-28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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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8.06.28 에세이

장전동 : 1999-2004, 공백, 2009-2011 

현 수

 

 

1. 청춘, 1999-2004

 

과 깃발을 만들어야 된다는 선배는 나를 데리고 학교 안의 대나무 숲 쪽으로 갔다. 깃대는 대나무를 쓴다며 숲으로 들어가더니, 그나마 대가 가는 것 하나를 골라 뿌리 윗부분을 발로 여러 번 차서 쓰러뜨리고는 비틀어서 뽑았다. 잔가지를 쳐낸 대를 끌고 선배와 함께 그 숲에서 나오던 그때, 우습지만 난 대학 생활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부모나 선생님에 의존해서 문제를 해결했다면, 그것을 온전히 내가 직접 하고, 심지어는 찾아내기까지 해야 한다는 것.

 

장전동에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그런 기분이었다. 문현동에서 장전동까지 가기 위해 나는 집에서 중앙시장을 가로질러 범일역까지 걸어간 다음, 범일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범일역까지 도보로 15, 범일역에서 부산대역까지 20, 다시 학교까지 10. 이래저래 한 시간 걸리는 거리를 통학하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렇게 먼 곳까지를 백일장도 아니고 수학여행이나 소풍도 아니고 매일의 생활을 하기 위해 간 건. 전혀 다른 느낌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미 그때 홀로서기의 기분을 이야기했다.

 

그때 부산대 앞은 뭐랄까, 순박한 청춘의 거리라는 느낌이었다. 나 같은 홀로서기의 느낌을 이제 막 체험하는 이들과, 한두 해라도 먼저 그 시기를 거쳐서 짐짓 어깨에 힘들어간 대학생들이 가득한 곳. 대학가 앞이 무릇 그렇겠지만 그 중에서도 부산대 앞은 물가가 낮았다. 프랜차이즈 가게도 거의 없고, 노래방은 1시간에 3천 원. 그것도 들어가면 3시간 4시간씩 줘서 주인이 이기나 우리가 이기나 해 보자 하는 동네였다. 주인 분들과 단골이 되는 것도 쉽고, 깨끗한 신식 느낌보다는 동네 포차 같은 허름함이나 혹은 아기자기함이 더 컸다. 큰 접시 하나를 가득 채운 3,500원 짜리 파전을 찾아 막걸리를 벗 삼는 것이 가능했던 동네.

 

학교 정문 옆에는 분식 포장마차가 즐비하고, 주점 골목도 화려하게 휘청거리는 유흥가보다 재잘거리는 학생들의 동네라는 분위기가 선연했다. 밤늦은 시간까지 그 대학가 거리는 풋풋한 설렘투성이였다. 그건 이 거리를 채운 학생들의 모습 때문도 있겠지만, 나라는 사람이 능동적인 경험에 노출된 건 죄다 이 거리에서였기 때문도 컸다.

 

난생 처음의 자취도 이때였다. 군대에서 전역한 2003, 다른 예비역 선배와 함께 반지하방을 얻었다. 선배와 내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딴 성남회관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이곳은 학과 사람들의 쉼터였다. 주인들이 나를 알아보는 단골 가게도 서너 군데가 생겼다. 전역하고 술에 취해 화장실 변기를 깨는 웃지못할 사고도 쳐 봤고, 생리통에 의식을 반쯤 잃은 첫 여자친구를 등에 업고 땀을 뻘뻘 흘려가며 달리기도 해 봤다. 그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그런 처음의 경험들은 나에게는 청춘의 대명사였다.

 

 

2. 아말감, 2009-

 

용호동에서 계약직으로 직장 생활을 하다가 끝나고 나서 다시 장전동으로 돌아왔다. 2005년 초 대학을 졸업하고 4년이 지나서였다. 대학시절 그 청춘의 시간을 처음 만났을 때에만 해도 나는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인 양 굴었는데, 그것은 아주 큰 착각이었다. 나는 계속 개구리였다. 장전동이라는 그 커다란 동네에서도 대학가 앞만 거의 왔다갔다했던 내가 뭘 알았겠나. 청춘의 거리는 일부분이었고, 대부분 지역이 주택가라는 걸 이때쯤에야 알았다.

 

주택가가 변하는 일이 있을까 했지만, 사실은 그곳도 계속 변하고 있었다. 이 무렵 나는 부산대역과 장전역 사이쯤에 자취방을 구했다. 그 인근은 자취촌이었는데, 내 대학시절에 비해 원룸이 많이 늘어났고 계속 늘어나는 추세였다. 작은 분식점이나 식당들이 자취촌 안까지 드문드문 파고들었지만 소비 구역과 주거 구역은 명확히 분리되어 있기는 했다.

 

4년 만에 장전동으로 돌아와서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내가 단골이었던 가게들이 반쯤 문을 닫았고, 세련된 인테리어의 신식 가게들이 많이 들어섰다. 수능 원서를 접수하러 들어간 대학 체육관 건물은 복합 상가 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태반이 익숙한 건물들 속에서 그 몇 군데의 공백만으로도 나는 이미 낯선 곳에 와 버린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허름함을 추억이라 칭하면서 붙잡고 있으려는 것은 아니다. 나보다 젊은 대학생들이 더 세련되다고 해서 그들의 청춘이 덜 순박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거리와 이렇게 변한 거리는 도저히 같은 동네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다른 느낌이라는 것 역시 변함이 없다. 그때 그 기분을 소설로 풀어 썼을 때, 4년 만에 돌아온 동네는 치아에 아말감을 때우듯 곳곳에 새 건물을 박아놓았다고 썼다.

 

아말감이라는 게 그렇듯, 처음 얼마간 어색하지 적응하면 또 괜찮아진다. 나는 다시 이곳에서 머물렀던 3년 동안 새로워진 동네에 적응했다. 없어진 만큼 새로운 단골이 생겼다. 젊은 사람이 새로 깔끔하게 차린 가게도 있었지만, 고갈비집이나 포차 같이 이모들의 가게들이 더 많긴 했다. 옛날처럼 막 싸지는 않아도 허름함의 추억을 술과 함께 들이키기엔 나쁘지 않았다.

 

2012년쯤 장전동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나서 가끔 한 번씩, 약속이 생기거나 이 근처에서만 살 물건이 있거나 할 때 한 번씩 찾아왔다. 부산대학교앞 거리는 올 때마다 뭔가 하나는 늘 바뀌어 있는 듯했다. 주택가들도 계속해서 신식 건물들이 들어섰고, 가게들도 점점 커지고 호화로워졌다. 장전 3동에 낮고 허름했던 주택가는 완전히 다 밀어 버리고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요즘 부산대학교 앞은 프랜차이즈들로 가득하다. 최근에는 한 번 갔다가, 그냥 서울의 번화한 젊은이들의 거리를 닮아간다는 느낌만 받았다. 세월이 흐르면 뭐든 세련되게 바뀌는 것이야 기정사실이건만, 서면이나 경성대 앞, 남포동 같은 곳과는 다른 맛이 있었던 곳이 그냥 여기저기 보이는 번화가를 닮아간다는 건 씁쓸할 따름이다. 작은 가게 하나가 없어질 때마다 내 추억 하나가 사라지며, 올 때마다 한두 걸음씩 점점 더 낯설어져 간다. 주거든 소비든 환경인 더 개선되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이련만, 나는 그런 사라져가는 낡음이 못내 아쉬워서 지금도 가끔씩 기억 속의 거리만 느리게 거닐 따름이다.

 

 

- 10년 역사를 뒤안길로 한 한페이지 단편소설에서 한때 몸을 묻었던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