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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생의 독서일기10] 책들의 밤_김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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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2-10 16:45 조회2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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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생의 독서일기10]

책들의 밤

- 책장을 정리하며 -

김재홍

 

 

얼마 전 출가를 위해 책장을 정리할 기회가 있었다. 미루고 미루다 시작한 책 정리는 생각보다 귀찮은 일이었지만 색다른 경험이기도 했다. 책들을 차곡차곡 박스에 담아 넣으며 대충 짐작해 봤을 때, 350권에서 400권가량이 되는 것 같았다(물론 다 읽은 책이라는 말은 아니다.). 버리기로 한 책들까지 하면 500권가량은 되는 듯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얼마 되지 않던 책이 어느새 이리 많이 쌓였을까. 새삼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미래에 꼭 읽을 거라는 욕심에 구매한 책, 약속시간 전 중고서점에 들르곤 하면 꼭 한두 권씩 사와 모인 책, 꽤 수준 높은 장서가 친구에게 기증받은 책, 이런저런 이유로 빌리고 돌려주지 않은 책, 길에서 주운 책, 심지어 훔친 책까지, 참 다양한 사연을 간직한 책들이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이곳에 놓이게 된 건지 기억나지 않는 책도 더러 있었다.

새로운 집에는 아직 주문해 놓은 책장이 오지 않았고, 책들은 지금까지 모두 박스에 고스란히 담겨 쌓여 있다. 올해 여름부터 이 지면에 독서 에세이를 싣기 시작하면서, 매달 한두 번은 어떤 책으로 에세이를 쓰면 좋을까, 하며 책장 앞에 앉아 이 책 저 책을 뽑으며 삼매경에 빠지기 일쑤였는데, 하필 마지막 10회 차에 이사를 하게 되다니, 참 묘한 일이다. 기왕지사 이렇게 되었으니, 책도 정리하고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에세이도 정리하면서 몇 가지 책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보는 것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 500권가량 되는 이 많은 책 중에서, 지금 시점에 어떤 책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을까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리라.

 

맨 처음, 어떠한 계시처럼 내가 읽어야만 하게끔 언도받은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 1938-1988)와 제임스 설터(James Salter, 1925-2015)의 책이 생각난다. 태어나서 처음 말도 안 되는 단편소설을 썼던 학부생 때였다. 그때 썼던 단편을 생각하면 길거리에 나체로 서 있는 것만큼이나 부끄러운데, 당시에 교수님께서는 이 말도 안 되는 단편을 꼼꼼히 읽으시고 피드백까지 주셨고(맹세코, 이러한 사실은 나체의 내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팔 벌려 뛰기를 하는 것만큼이나 부끄러운 점임을 고백한다.), 수업이 끝나고 나서는 나를 따로 불러 종이에 날리는 글씨로 두 권의 책을 적어 주셨는데, 그 책이 카버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과 설터의 어젯밤Last night이라는 책이었다. 모르겠다. 이 두 대가의 최고의 단편집이 내가 쓴 나이브함으로 범벅된 말도 안 되는 소설과 어떤 접점이 있는지는, 아직까지도. 어찌 됐건, 그 후로 레이먼드 카버와 제임스 설터의 이름으로 번역된 모든 책이 책장에 꽂히게 되었다. 추구하는 글의 스타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 또한 물론이다.

 

취향을 구축해가고 수준을 높여 가면서, 서정적인 것보다는 지적이고 논리적이며 날카로운 글과 사상을 추구해오던 중, 꽤 따스한 위로를 받은 서정적인 단편도 생각이 난다. 연초, 타국에서 체류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여러 의미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상황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날을 며칠밖에 보내지 않았는데도, 내 책들을 몹시 그리워했던 것을 보니, 당시에 내가 얼마나 고립되어 있으면서 더 고립을 원했는지 알 것 같다.

외국 생활자에게 종이책이란 너무 큰 사치이기에, e-book은 대안이 되기 좋다. 어느 날, 차로 장거리를 이동할 일이 있었을 때, 주위 소리를 차단하는 헤드셋을 쓰고, e-book으로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에 수록된 이장욱의 절반 이상의 하루오라는 작품을 읽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고립감 때문이었나, 아니면 여행하는 자들이 느낄 수 있는 센티멘털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소설이 뿜는 낭만적인 느낌과 그 낭만이 퇴색되어 가면서 드러나는 슬픔에 매료되어서? 어쩐지 조금 뭉클해지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에 놓인 스스로가 날을 세워가면서 지켜내고자 한 냉정함이 잠시간 눅는 느낌을 받은 것도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런 순간은 타지 생활의 기억을 좀 더 깊고 풍요롭게 만들어준 것 같았다. 이장욱의 절반 이상의 하루오는 내 e-book 리더기에 고요히 들어있다.

 

그 외에도 너무 많은 책들이 소중한 기억과 함께 다가온다. 흔들림 없는 논리를 정립시켜 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해준 한병철의 책들. 사랑에 빠지면서 연인에게 선물로 받은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 세심하고 깊이 있으면서 날카롭고, 동시에 따뜻한 묘사로 충격을 준 윌리엄 트레버의 여름의 끝과 그의 단편집 비 온 뒤. 언제고 다시 펴보고 싶은 앨리스 먼로의 디어 라이프. 이토록 인간에게 무자비한 충격을 줄 수 있을까 싶은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들. 주제 사라마구, 코맥 맥카시가 그려내는 디스토피아의 절정. 로맹 가리 혹은 에밀 아자르의 소설만큼이나 흥미로운 삶. 다 나열하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도 쌓여갈 수많은 책. 이들은 모두 내 책장에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내 책들은 내 방에 들어온 후로 나와 한 공간을 공유하고, 낮과 밤을 공유한 동지들이다. 특히 수많은 밤을, 졸기도 하고 밤새워 읽기도 하면서 내 것이 되어갔던 소중한 사물들이다. 책들은 지금 박스 안에서 새로운 공간을 맞이하기 전이다. 박스 안에서 잠들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 것이 된 이후 처음 맞는 휴식, 긴 밤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책장이 오면, 나는 박스를 열어 잠들어 있는 책들을 깨우고 새로운 공간에 그것들을 빼곡하게 꽂을 것이다. 책은 나와 함께 또다시 한 공간을 공유하고, 낮과 밤을 공유할 것이다.

그때까지 이 긴 휴식을, 긴 밤을 잘 보내기를. 책들에게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말해줘야 할 것도 같다.

 

 

레이먼드 카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정영문 역, 문학동네, 2005.

제임스 설터, 어젯밤, 박상미 역, 마음산책, 2015.

이장욱, 절반 이상의 하루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10주년 특별판수록, 문학동네, 2019.

한병철, 피로사회 , 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2.

롤랑 바르트, 애도 일기, 김진영 역, 걷는나무, 2018.

윌리엄 트레버, 여름의 끝, 민은영 역, 한겨례출판, 2016.

, 비 온 뒤, 정영목 역, 한겨례출판, 2017.

앨리스 먼로, 디어 라이프, 정연희 역, 문학동네, 2013.

플래너리 오코너, 플래너리 오코너 :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 30, 고정아 역, 현대문학, 2014.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정영목 역, 해냄, 2019.

코맥 맥카시, 로드, 정영목 역, 문학동네, 2008.

로맹 가리, 새벽의 약속, 심민화 역, 문학과지성사, 2007.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용경식 역, 문학동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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