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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특정다문(文)10] 파편 줍기 : 내일의 어젯밤_박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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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2-10 09:41 조회5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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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특정다문(文)10]

파편 줍기 : 내일의 어젯밤

박창용

 

 

1.

  읽히는 것이 두렵다. 내가 의도하지 않거나 의식하지 못한 나의 말과 몸짓을 당신은 읽으려 한다. 뜻이 없는 것에 뜻을 끼얹어 무의미한 때를 씻어내고 읽는다. 그러나 당신이 씻어낸 그 때가 곧 나다. 나를 씻어내려는 그 새파란 눈빛이 두려워서, 빛이 없는, 밤으로 나는 숨는다.

 

2.

  내 기억이 시작되던 집이 떠오른다. 비다운 비가 내리면 어김없이 빗물이 새던 천장. 툭툭, 노란 장판에 떨어지는 물방울. 새는 물을 받기 위해 방에 들인 대야나 들통에 닿지 않게끔 비스듬하게 누워서,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던 밤. 어째서 낮보다 밤에 그 소리가 더 컸을까. 어째서 더 많은 비가 내리는 것만 같을까.

  '?'라는 의문사가 일상에서 쏟아지던 시절이었다. 밤은 어둠을 주고, 어둠 속에 무엇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으므로, 나는 밤이 두려웠다. 밤의 어둠에서는 무엇이든 생기고 태어나고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의문으로 가득 찼던 세계는 수많은 답변 내지 무응답으로 차츰 잠식당했다. 그러면서 어둠 자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의문의 시절, 밤에서, 어둠에서 생겨나던 것들은 나의 상상과 공포였다.

  늙은 여자는 저녁 드라마가 끝나면 이부자리에 누워 머리를 베개에 대자마자 잠들었다. 어떻게 아냐고? 그가 남달리 크게 코를 골았기 때문이다. 물 받는 그릇마다 다른 높낮이와 박자로 퍼지던 물방울 소리. 그것은 일종의 반주였고, 그는 코를 골아 독무대를 꾸렸다. 한 악장이 끝나면 그의 숨이 잠시 멎었다. 목젖이 코 뒤쪽 구멍을 막은 것이다. 컥컥, 하는 소리가 몇 번 나면 다음 악장이 시작되었다. 이 밤은 끝나지 않을 거야, 되뇌던 시간. 그러나 어느새 잠든 나는 다음 날 아침 축축한 공기를 마시며 등교를 했다.

 

3.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비가 새지 않는 빌라로 이사를 했다. 저녁을 항상 밖에서 해결하는 아버지에 이어 형과 나도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지는 나이였다. 늙은 여자는 제 새끼들이 들어오지 않으면 선잠을 잤다. 코를 골아도 아주 작게, 드르렁. 가족 중 누구든 현관문을 열기만 하면 그는 귀신같이 현관문 소리를 잡아채고 방문을 열어, 이제 왔나, 하고 쉬고 잠긴 목소리로 맞이했다. 가족들이 모두 집에 들어오면 비로소 우렁차게 코를 골며 잠들었다. 마치 그 소리로 악귀이라도 쫓겠다는 듯이, 악몽을 꾸지 말라는 듯이.

  그는 날이 더워지면 남쪽 창문을 바라보며 거실 바닥에 앉았다. 한창 남쪽으로 기운 여름 햇볕을 배경으로 그가 앉은 뒷모습은 그늘이 너무 짙게 드리워서, 그 모양대로 밤을 떼어와 세워둔 것 같았다. 힘겹게 숨을 쉬는 어깨가 느리게 부풀다 줄어드는 것을 반복하지 않았다면 누구나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등에 밤을 씌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남쪽 창문과 북쪽 창문 사이로 부는 미지근한 바람에 흔들리던 낡은 모시 나시가 점차 헐렁해지는 것을, 그의 몸피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그의 힘겨운 호흡을 거들기 위해 밀면을 시키곤 했다. 입맛이 없다던 그는 밀면 한 그릇을 스무 살 전후였던 나만큼 빨리 비우고선 집안일을 재개했다. 그가 그토록 청소에 집착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는 집이라는 공간의 주인이었으며, 가족이 온전히 밤을 보내기 위해 항상 잠자리를 가꿔야 했던 것이다. 너희가 언제든 돌아와 편히 잠을 자야 한다는 신념.

 

4.

  가끔 숨을 몰아쉬는 당신을 보면 생각이 나는 것이다. 죽은 나의 할머니의 호흡, 온몸으로 공기를 넣어야만 겨우 쉬어지는 숨 - 할머니가 직접 뜨거운 낮에 시원한 밤을 부른 뒤 심호흡을 한 것인지, 아니면 밤이 할머니의 등짝에 들러붙어 낮을, 여생을 침략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밤이든 낮이든 당신이 편히 숨을 쉬길 바라는 것이다.

 

5.

  군 생활을 절반 정도 마쳤을 때 그가 죽었다. 입원부터 중환자실에 들어 임종을 맞기까지 불과 일 년 남짓의 시간이었다. 그 사이 나는 밤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숨이 멎었지만 관에 들기 전까지 그는 주변의 소리를 듣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나는 더 크게 울었던 듯하다. 좀 들으시라고, 막내가 왔다고. 거대한 나무젓가락같은 몸이 천으로 둘둘 말려 관에 들어가던 그의 얼굴이 이따금 떠오른다. 핏기를 잃어 잿빛이 된 얼굴, 한밤중 안개 낀 숲과 같은 그 얼굴을 횃불로 겨우 밝히듯 분홍색 분으로 옅게 칠한 뺨. 그의 몸은 재가 되어 몇 년 만에 눈이 쌓인 금정산자락 어딘가에 뿌려졌다지만, 그의 넋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내가 내 몸에서 벗어난다면 그의 거대한 귀를 가장 먼저 볼 수 있지 않을까.

 

6.

  적어도 그의 귀는 밤에 더 예민했을지언정 낮에도 쉬지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는 밤이든 낮이든 가족을 생각했다. 그 생각이 너무 심하여, 때론 나의 숨을 빼앗는 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의 헌신 속에 자랐지만, 이제는 낮과 밤이 가끔 무섭고, 낮과 밤에서 안도할 수 없는 듯하다. 당신은 이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헤아리고 있을 것이다.

 

7.

  누구도 나를 읽지 않으면 어쩌지? 내가 밤마다 여기서 이렇게 당신을 향해, 악다구니를 치는데, 당신의 의식은 나를 모른다. 그리하여 나는 읽히지 못한다. 투철한 야맹증을 앓는 당신으로 진화한, 과거의 당신이었던, 당신을 겹겹이 이룬 모든 존재를 차근차근 벗겨낼 것이다. 나의 새파랗게 변해버린 이 눈빛으로.

  저기, 밤이 지워지고 있다. 검은 종이에 떨어진 구름색 잉크, 잠식 또는 침략.

  저기, 낮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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