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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 장07] 깊은 밤, 노크_윤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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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5 13:59 조회6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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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 장07]

깊은 밤, 노크

윤이삭

 

 

  정만은 쉬지 않고 말했다. 평소엔 과묵하고 조용한 남편이었다. 돌하르방과 같이 사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정만은 일을 나가지 않으면서부터 말수가 늘었다. 지연은 정만이 부쩍 외로움을 타는가 싶어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야기는 종횡무진 하다가 결국 워킹 홀리데이로 이어졌다. 29, 20대의 마지막에 이르러 정만은 스스로 이룬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떠나기로 했다. 복잡한 비자 발급 과정을 거쳐 도착한 호주는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지연은 반복된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첫 단추부터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다. 보수적이고 늘 주저하는 성격의 정만이 호주로 무작정 떠났다는 사실부터 의문이었다. 게다가 이야기는 한국에서 겪을 수 있는 일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이야기 속의 정만은 여러 건물을 전전하며 바닥을 쓸고 닦을 뿐이었다.

  팀장이 유난스럽게 억지를 부린 날이었다. 지연이 정리한 회원 명단을 다른 양식으로 다시 작성하라고 했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니 정만이 저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된장찌개에선 썩은 생선을 말린 냄새가 났다. 지연은 헛구역질이 나 저녁을 걸렀다.

  설거지를 마치고 들어온 정만이 옆에 누웠다.

  “호주에서 말이야…….”

  지연은 지친 하루를 잊고 달아나고 싶었다. 지연이 대꾸를 하지 않아도 정만은 이야기를 그치지 않았다.

  “형과 멀리 청소를 나갔던 날이었지.”

  ‘은 정만과 짝을 이룬 두 살 많은 한국인이었다. 역시나 워킹 홀리데이로 비자를 받은 인물이었다.

  “브리즈번에서 한참 벗어나 숲길을 내달렸어. 레드뱅크와 우드엔드를 지나 만난 숲길이었지. 청소할 건물이 그렇게나 멀리 떨어져있던 날은 처음이었는데. 사장이 내어준 2인승 포터를 타고 갔지. 기름 값이 더 나올 지경이었어.”

  수십 번 반복한 이야기 가운데 말마따나 처음으로 호주의 풍경이 묻어났다. 지연은 눈을 감은 채로 곧게 뻗은 숲길을 떠올렸다.

  “사장이 시킨 일이니 따랐지 뭐. 창밖의 풍경에 시선을 뺏기기도 했고. 그거 알아? 호주의 하늘빛이 이곳과 전혀 딴판이라는 거. 막 짜낸 물감처럼 선명하다는 거. 형도 운전을 하면서 적잖이 감동한 모양이야. 그날따라 우리 둘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지. 평소라면 주구장창 시답잖은 이야기로 시간을 죽였을 텐데.”

  지연은 정만이 어째서 영어를 한 마디도 뱉지 못하는지, 자신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지 알 수 있었다.

  “샛길로 빠져 이론바크를 지나는 참인데 형이 그러는 거야. ‘이 길이 맞나?’ 나는 커다란 지도를 펼쳐들고 확인해 봐도 알 수가 없었어. 표지판 하나 없는 숲길이 이어졌거든. 근데 그거 알아?”

  지연은 부지런히 잠을 부르고 있었다.

 호주에는 사람보다 캥거루가 많대. 인구수가 2500만 정도인데 캥거루는 4000만 마리래. 그래서 수를 조절하려고 포획해서 고기나 사료로 쓰는데.”

  지연은 숲길 너머로 뛰어다니는 캥거루를 보았다. 잠에 방해가 되었다.

 “차에 치어 죽는 캥거루 역시 많아. 무턱대고 뛰어다니니. 한 번은 캥거루끼리 싸우는 걸 봤는데 어마무시 하더라. 서로 막 펀치를 주고받는데 어휴, 살벌하더라구.”

  역시나 오늘도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는 캥거루처럼 뛰어다녔다.

 “형이랑 건물을 찾는데 하늘이 어둑해지는 거야. 갑자기 빗줄기가 쏟아지더니 한치 앞도 안보이더라고. 호주 날씨가 원래 그렇게 변덕이 심해. 정말 한치 앞도 안 보이는 길이었어……. 그만 돌아갈까 했는데 갑자기 쿵. 포터에 무언가 부딪쳤어. 형은 포터를 급하게 세웠지. 우리 둘은 놀란 눈을 뜨고 한참 서로를 바라봤어. 그때 형이 먼저 입을 여는 거야. ‘캥거루였어.’ 형은 다시 운전대를 잡고 엑셀을 급히 밟았는데. 그날 결국 청소할 건물은 찾지 못했던 것 같아.”

지연은 어느새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잠이 그려낸 너른 들판에 캥거루가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그러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마구 펀치를 날렸다. 정만은 아랑곳 않고 말을 계속 이었다.

 “형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귀국했어. 비자 기간이 다 되었다나. 확실히 물어볼 게 있었는데. 근데, 지금도 캥거루는 어디에나 많겠지? 공원에도, 길거리에도, 어느 집의 앞마당이나, 어둑한 숲길에도 여전히 뛰어다니겠지?”

  지연은 캥거루들이 투닥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쿵쿵쿵쿵. 정만은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거실에 나가보니 현관이 세차게 울렸다. 쿵쿵쿵쿵. 문을 두들기는 소리. 정만은 현관에 천천히 다가섰다. 그에 맞춰 문이 더 다급하고, 거칠게 울어댔다. 정만은 밖에 소리가 새나가지 않게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문 바깥을 비추는 외시경에 눈을 갖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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