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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와 살기07] 좋은 작품_이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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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391회 작성일 20-10-08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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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와 살기07]

좋은 작품

이기록

 

 

예전 광고의 한 대사처럼 지긋지긋한 질병이 끝날 줄을 모른다. 밖에 외출도 많이 줄어지고 책읽기 좋은 계절도 찾아왔으니 느긋하게 책읽기에 도전해볼 계획을 가져본다. 그러면서 좋은 작품이란 무엇일까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아주 추상적인 질문이지만 글을 쓰고 읽는 입장에서 이보다 중요한 질문은 없을 지도 모른다.

작년에 지역과 관련된 강의에 우연히 시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되었었다. 첫 강의 자리에서 서로 인사를 하고 준비해 간 몇 편의 시를 서로 낭송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늦게 들어온 한 분이 있어서 다음 시를 낭송해 달라고 하니 바로 낭송해주기 시작했다.

김천 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있다.’를 읽으며 잠시 뜸을 들이고 있는 듯 싶다가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떨리는 목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김천 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 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겨 붙은 야윈 그녀가 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波浪)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 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累代)의 가계(家系)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 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라는 시인데 위 시를 읽으며 그분은 위 시를 읽으며 계속해서 훌쩍이고 있었다. 낭송을 마치고 그분은 미안하다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다. 자신도 병원에서 가족들의 병 간호를 많이 했었는데 그때 기억이 떠올라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 준비해간 작품에 이렇게 감동을 받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기에 나에게도 너무 과분한 경험을 얻게 된 것이었다. 그분 덕에 계속된 강의도 아주 만족스러웠었다.

감동은 경험에서 나온다. 경험하지 않은 경험은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할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아마 좋은 작품이란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공감하는 작품일 거다.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오류를 내포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문학이란 장르가 독자와 점점 괴리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왠지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문학은 함께 하는 소통의 공간이다.

며칠 전 김수영의 시를 다시금 보게 되었다.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 김수영, “공자의 생활난중 일부

 

김수영이 이야기하듯 문학의 길은 올곧은 시선으로 사물과 현실을 제대로 보아가는 자리이다. 그리고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동무여라고 말하고 있듯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이 함께, 모두 함께 공감하여 가는 길일 거다. 그렇게 조금 문학과 삶에 가까워지는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