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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랩_김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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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0-05 10:01 조회6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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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랩

 

김석화

 

 

후기 쓰고 있어요? 아니. 그럼 이번에 숙제 또 안 낼 거예요? 아니.

글은 2주 전부터 쓰고 있었어,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시간이 없었지만 후기의 말들이 깃발처럼 등 뒤에서 팔랑였지.

 

책방에서 진행한 글쓰기 수업의 마지막 주제가 후기여서일까. 모든 모임은 시작과 끝이 있는데 이것도 하나의 끝일뿐인데 유독 이 사람들을 한때에 묶어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말과 표정과 손짓과 글자들이 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뻣뻣한 등과 꼼지락대는 손가락들, 제각각의 머리카락. 집중과 딴 짓, 호의와 어색한 우정, 질문과 의문. 직진과 회전의 갈팡질팡.네 시간의 열렬하고 느린 템포. 수줍은 악수 아래 흐르던 전류. 열 시가 넘어가면 목구멍이 칼칼해 냉장고 속 맥주로 손을 뻗고 싶은 충동.(수업 3시간째) 한 계절을 꼬박꼬박 함께 땀 흘린 사람들.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과 함께 잠을 잔다고 했는데. 그들의 괴물들도 함께 등장했던, 그녀들과 그와 나의 괴물을 함께 불러 속닥거렸던 시간.

그 너머로 나부끼던 깃발.

흔들리던 깃발은 바라볼 뿐이었고 손수건은 잠시 흔들어보았다. 안녕, 안녕하고.

석 달, 뭉텅이의 시간도 내일 이후면 없다. 외로운 책방은 또 다른 뭉텅이를 붙잡고 꼼지락거려야겠지. 그런 뭉텅이는 쉽게 들어오지 않는데 먼지라도 굴려야 하나. 여섯 번의 약속으로 한 계절을 잘 보냈다. 슬금슬금 힘이 빠져갈 즈음 예약 없는 약속이 돌아왔으니까. 어떤 예열도 없이 달아오르던, 어떤 장소에서도 없을 것 같은 여름밤 목요일들. 매우 찐한 글들. 어떤 때는 수줍어지고 어느 때는 노인이 되어버린 듯 나를 가만 두지 않았던 그 글들, 어쩌면 사람들. 사라질 사람 대신 글을 앉혀볼까. 그들이 남긴.

후기가 왜 이러나. 그 시간이 참 좋았다 말하려 했는데 괜히 손수건만 적시고 있다. 규빈의 말을 섞어 우짜쓰까. 우리에게 남은 이 한 마디. 실로 우짜쓰까의 재발견이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글을 쓰는 것은 이름을 새로 적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러고 보면 우리가 그러했다. 오이와 담배, 우수수 박혀 있던 인용과 피아노와 감나무와 감정의 방들과 자살을. 이름뿐이던 이름들을 새로 적고 이름들을 재발견, 재발명하면서 보냈구나. 꾸준하고 힘들면서도 명랑했구나.

 

모임 하는 동안 생활문학 외에 여러 편의 글을 더 써야 했다. 한 번은 3개가 한 주에 몰려서 앞부분을 큰 얼개로 공유해 서로 다른, 하지만 비슷한 것을 3개 쓰기도 했다. 잠시 부린 묘기에 혼이 빠졌다. 그런 예외는 두고 내 생활에서 꼭 써야 하는 글,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글은 거의 없다. 나는 매우 헐렁한 사람이라 스스로를 조이지는 못한다. 그러니 아마도 다시 헐렁해지겠지. 글쓰기가 생활을 조였다 늘였다 했는데 다시 생활은 탄력을 잃겠지. 나만 그러하기를.

 

폐허 위에 생겨난 사람들의 공동체가 생활을 다시 일구어내는 것. 리베카 솔닛의 말을 빌려 고백하자면 그러하다. 책방 살림과 나의 생활은 재난이었지만 잠시의 글쓰기 우물가는 메마르지 않았었다. 글인지 물인지를 퍼 올리고 서로 마시고 질질 흘리고 뿌려대기도 하면서.

나의 글을 목소리 내어 발표한 날, 대성 선생님은 랩을 듣는 것 같다고 했는데 그 느낌이 궁금해 밤에 얼굴 붉히며 들어보았다. 과연 오래되어 늘어진 테이프 마냥 글인지 말인지 하는 것들이 줄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생각난 건 우리들의 한여름 랩. 시원하게 갈라진 랩 치마를 입고 펄럭거리며 다녔던 여름이 지나는 동안, 중얼거리고 흥얼거린 길고 짧은 생활의 랩. 늪을 랩으로 바꾸어버린 여섯 번의 활력. 주고받은 추임새.

 

 

나는 다시 랩을 이어갈 수 있나. 아주 느린 랩을 쓰고 두르고 여미는 것을. 새로 쓰인 랩을 다시 듣고 싶다. 각자의 방식대로 썼던 그들의 글을. 글로써 서로의 생활을 염탐하고 응원했던 여름이 훌쩍 갔다. 생활도 탐하고, 문학도 탐했던. 생활문학탐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멀리서 그들 각자의 랩은 쓰이겠지. 책방은 먼지를 굴리는 대신 또 다른 만남들을 굴려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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