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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근본주의03] 고리오 영감_정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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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10-03 08:56 조회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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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근본주의03]

고리오 영감

정진리

 

 

*<소설 근본주의>는 세상의 모든 현상을 소설로 풀이하는 편협한 코너입니다.

 

 

정권의 인사 논란으로 나라가 연일 시끄럽다. 등용으로 적폐 개혁을 기대했던 조국과 추미애가 자식을 편법으로 감쌌다는 정황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사실 정황은 좀 더 지켜봐야할 테지만 그 의혹들이 진실과 무관하진 않아 보인다. 이에 최순실-정유라 게이트 때와 마찬가지로 국민은 분개하고 있다. 그 분노는 부모가 자식에게 사회 통념적으로 정당하지 못한 이득과 권리를 부여했다는 데 연유한다.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부모를 잘 만나야 한다는 한탄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그런데 며칠 전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이 아들딸에게 각각 이마트와 신세계백화점 주식 수천억 원대를 증여한 것에 대해서는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여느 재벌과 다르게 정당한 상속세를 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모 잘 만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불평등이 정당해지는 건 아니다. 일반인이 평생 벌어도 꿈도 꾸지 못할 금액을 누구는 너무나도 손쉽게 주고받는다. 정당하게 취득한 부를 대물림하겠다는데 무엇이 나쁘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회는 지금 부의 이동이 지나치게 고착화돼 있어, 이러한 세습이 아니고서야 높은 계층에 머무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자본의 세습에 깊은 우려를 표하는데, <21세기 자본론>에서 오노레 드 발자크의 장편소설 고리오 영감을 세 번에 걸쳐 인용한다. 그 주된 요지는 세습으로 얻는 불로소득이 근로소득을 압도한다는 내용이다. 주인공 라스티냐크는 시골에서 온 법대생이다. 그의 가족은 포도밭을 일구고 있으며 장남의 출세를 돕고자 물심양면 생활비를 지원한다. 그런데 라스티냐크는 문득, 법관에 임명돼 돈을 벌어들이는 것보다 사교계에 진입하는 편이 더 빠르고 확실한 성공임을 짐작한다. 사교계에 진입해 이름을 떨치려면 아무래도 후원자가 필요한데, 가난한 법대생인 라스티냐크의 패션은 낡을 대로 낡아 천대받기 일쑤다. 결국 그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부쳐 천이백 프랑을 투자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는 확실하게 투자라고 말한다. 이는 부모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서야 야망을 시작조차 하기 힘들며, 자본이 뒷받침될수록 더 높은 수익률을 얻을 수 있음을 묘파한 발자크의 조소가 섞여있는 대목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소득 및 부의 계층 구조에서 최고 부유층이 누릴 수 있는 생활 수준은 노동에 기초한 소득만으로 기대할 수 있는 정도를 크게 넘어서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런데 누가 일을 하겠는가?

<고리오 영감>은 부의 세습이라는 키워드 그 자체인 소설이다. 아울러 같은 하숙집에서 머무는 음험한 인물 보트랭은 심란한 주인공에게 처녀 빅토린 양과 결혼하고 그의 오빠를 살해해 유산을 몽땅 물려받자고 꼬드긴다. 각종 불확실성을 떠맡은 상황에서 운 좋게 법관으로 일한다 해도 고작 연봉 5000프랑을 버는 반면 빅토린의 100만 프랑 유산은 연간 5만 프랑을 수익으로 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고리오 영감은 제면업자로 성공한 부자인데, 전형적인 딸바보로서 그의 딸들인 아나스타샤와 델핀에게 각각 50만 프랑을 지참금으로 준다. 고리오 영감이 나올 당시인 프랑스 왕정복고 시절 1인당 연평균 소득은 고작 400-500프랑이었다. 조선왕조가 500년이라는데, 이러한 조선의 흥망성쇠가 두 번 반복될 만큼인 천 년 동안 일반인이 일해야 저들이 탕진하는 잠시간의 허영에 가까스로 발맞출 수 있는 셈이다. 지금 재벌이 상속받는 재산과 우리가 벌어들이는 연봉을 비교하자면 보다 쉽게 감각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 소득만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본질적으로 환상이다. 발자크는 이를 놓치지 않고 스스로 정확히 진단한 프랑스 사회를 문학적인 주제로 바꾸어놓았다.

이미 이곳이 돈으로 타락한 사회라면 적어도 그 돈이라도 재분배가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곳은 계속해서 우울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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