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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가 되어서도 일상을 떠나지 못하는 망령들: 콜슨 화이트헤드의 <제1구역>_정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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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9-15 13:59 조회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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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가 되어서도 일상을 떠나지 못하는 망령들: 콜슨 화이트헤드의 <제1구역>

 

정희연

 

다사다난이라는 말이 얄팍하게 느껴질 정도로 미증유의 시간을 살아내고 있다. 재난은 문만 열면 맞닥뜨리는 것, 우리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다. 불현듯 새벽 창문을 열었을 때 가을 공기가 찾아온 걸 느꼈지만, 길었던 장마와 가을 태풍이 할퀴고 간 상처도 컸다. 그즈음 나는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슬프면서도 웃긴 공론의 장(?)을 목격했다. 내용인즉슨 ‘한국 직장인들은 좀비가 나타나도 회사를 갈 것이다’라는 것. 폭우에도 출근 시간에 맞춰 어떻게든 직장에 가는 이를 본 한 네티즌이 한 말이었다. 많은 댓글이 꼬리를 이었고, 그중 이마를 ‘탁’ 치게끔 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좀비 돼서도 출근할 듯’이란 말이었다. 

좀비 서사에서 좀비가 변화하고 있다. 일종의 진화라고나 할까. 알 수 없는 원인에 의해 깨어나 사람들을 공격하고 물어뜯어서 다른 생중사 시체들을 만들어내는 좀비의 원형은 유지되지만, 이제 각 서사에서마다 그 특징들이 추가되고 있다. 가령 K-좀비들은 성격 급한 우리네 정서를 반영한 것인지 잘 달린다. <부산행>(2016)이나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시리즈에서의 좀비들을 떠올리면 된다. 지난 6월 개봉한 <살아있다>에서는 한 가지 양상을 더 추가했다. 좀비가 되기 전의 일상적 행동 양식을 기억하고 행하는 개체를 등장시킨 것이다. 

북미로 눈을 돌려보자면, 2011년에 ‘출근하는 좀비’도 등장한 바 있다. 더 정확하게는 출근해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좀비다. 좀비의 형태가 사회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생전 ‘워라밸’을 유지하지 못해서 한이 맺혔든, 노동이 개인 인생의 전부를 차지할 만큼 값어치가 있었든 간에, 좀비가 되어서까지 직장을 떠나지 못한다는 건 슬픈 일이다. 오늘 소개할 포스트-아포칼립스 서사는 우리가 흔히 아는 좀비와 한 장소를 떠나지 못하는 좀비를 함께 등장시키는 소설인 콜슨 화이트헤드(Colson Whitehead)의 <제1구역>(Zone One, 2011)이다.1)

<제1구역>의 특징이라면 앞서 언급했듯 두 가지 형태의 좀비가 동시에 등장한다는 것이고, 종래의 좀비 서사들에서 흔히 익숙하듯이 그들로부터 살아남으려는 인간들의 긴장감 넘치는 사투가 소설의 주는 아니라는 것이다. <제1구역>은 마크 스피츠(Mark Spitz)라는 별명의 주인공이 겪는 포스트-아포칼립스 세계에서의 일상들을 세 개의 장—「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으로 구성해 느릿느릿한 속도로 따라간다. 그는 ‘붙박이 망령’(straggler)들, 즉 처음 발견되었던 장소에 머물러 있는 좀비들을 처리한다. 

소설에서 마크 스피츠가 가장 처음으로 붙박이 망령들을 처리하는 장소가 다름 아닌 회사다. 그곳에 출근한 상태로 좀비가 되어버린 그들이 여전히 상주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마크 스피츠는 “익숙한 모습을 발견”(28)한다. “그들은 그가 알고 지냈거나 사랑했던 사람들과 비슷하게 보였다”(28). 

 

망령들은 한때 담보대출 원리금을 제때에 상환하고, 광고에 나오는 아침 식사 시리얼을 식탁에 올리던 사람들이었다. […] 망령들 중에는 놀라운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하고, 가치 있는 일에 매달 기부를 하고, 역시 지금은 죽어버린 금융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퇴직연금을 현명하게 분산투자 하고, 머릿속에서 좋은 학교가 있는 지역의 경계선을 자기 동네 지도와 겹쳐보던 사람들도 있었다. (41) 

 

붙박이 망령들을 처리할 때마다 팀원들과 마크 스피츠는 좀비들의 재앙 이전의 삶을 상상하는 놀이를 즐기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이 그들을 소재로 만들어낸 괴물을 볼 뿐”(313)이라는 것, 더 직설적으로는 그들 자신을 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금요일」의 초반부에 마크 스피츠는 창밖의 뉴욕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도시 시민들의 모습이 조각조각 전시되어 있었다. 불합리한 추론을 좋아하는 큐레이터가 기획한 전시 같았다”(13). 그리고 그 큐레이터는 바로 작가, 즉 화이트헤드이며, 이 문장은 <제1구역>의 전개 방향과 주제를 메타적으로 암시하는 텍스트 내부의 제사(題詞)로 읽기에 손색이 없다. 화이트헤드는 한 인터뷰에서 오늘날에 대해 “내가 생각하기에 세상은 충분히 모든 종류의 좀비들로 충분한 것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작가가 말하는 모든 종류의 좀비들에 폭우가 쏟아져도 기어이 회사에 당도하고 마는 우리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 자연도 우리의 출근을 막지 못했지만 불현듯 더 무시무시한 행성적 재앙이 닥치면, 그곳에서 생을 마무리하거나 혹은 좀비로 깨어날 우리 말이다. 조금은 느린 호흡의 색다른 좀비 이야기를 경험하고 싶다면 <제1구역>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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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해 여름 국내 번역 및 출간되었다. 이하 작품과 작품 속 언급되는 용어와 쪽수는 <제1구역>(김승욱 옮김, 은행나무, 2019)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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