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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특정다문(文)05] 먹고 사는 짓 : 돼지국밥 편_박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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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9-10 20:56 조회3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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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특정다문(文)05] 

먹고 사는 짓 : 돼지국밥 편

박창용

 

 

새끼손톱만 한 생채기를 여럿 새긴 뚝배기 속, 손가락 두 마디 길이로 잘린 정구지 몇이 보얀 국물 위에 떠있다. 그 아래, 국물 못지않게 흰 쌀밥이 돼지고기와 양념장을 깔고 앉은 채 국물에 몸을 담갔다. 새우젓과 소면을 넣고 숟가락으로 몇 번 헤집으면 국물은 점차 주황색을 띠기 시작한다. 잘 섞은 국밥을 한 숟가락 크게 퍼서 입에 넣는다. 뼈와 고기를 우린 국물의 구수함이 먼저 밀려오고, 소면과 밥을 씹기 시작하면 각각의 달큼함이 다가온다. 이내 부추의 풋내와 새우젓의 감칠맛이 입 안에 가득 찬다. 마늘이나 풋고추를 쌈장에 찍어 으적으적 씹으면 비로소 이마에 땀이 스민다. 입 안에서 맴도는 맛과 향이 사라지기 전에 소주를 한 잔 털어 넘겨, 그 쓴 맛으로 입과 식도를 정리한다. 돼지국밥 한 숟갈의 완성이다.

 

부산 사람, 넓게는 영남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 속 어느 장면에서 김을 펄펄 쏟아 올리는 돼지국밥이 있을 터이다. 나의 경우, 중학교 시절 가깝게 놀러갈 수 있었던 부산대앞에 있는 돼지국밥 골목을 쏘다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당시 친구 서넛과 어울려 목욕을 하고 돼지국밥을 먹은 뒤, 노래방에서 음료수를 마시며 가무를 즐기는 것이 필수적인 주말 일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돼지국밥을 맛있게 먹기 위해 목욕으로 땀을 빼고, 돼지국밥으로 그득 채운 배와 기력을 즐겁게 꺼뜨리기 위해 노래방에 간 것이 아니었나 싶다. 넷이서 국밥집에 앉으면 일단 공깃밥 두 개를 추가하고 시작할 만큼 먹성이 좋은 나이였으니까. 나이가 찬 이후로 돼지국밥으로 유명한 서면과 범일동 등을 찾아가곤 하지만, 15년 전에 먹으러 다녔던 국밥이 주던 경지는 결코 느낄 수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이제는 부산대앞에서도 마찬가지.

 

한편 부산에서 돼지국밥집만큼 자주 개업하고 또 폐업하는 업종이 또 있을까 싶다. 부산에서 나고 자라 국밥에 대해 제법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가게를 열었다가 이내 닫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았다. 여러 식당을 돌아다니며 따지기 좋아하는 내가 볼 때 돼지국밥이 가져야할 소양을 잘 몰라서 그런 것 같다. 밥을 되게 짓는가 아니면 질게 짓는가, 밥을 식혀서 쓰는가 아니면 뜨겁게 쓰는가, 뚝배기를 국물에 데우는가 아니면 불에 데우는가, 정구지를 상에 내기 전에 무치는가 아니면 미리 무쳐놓는가, 담백한 고기를 쓰는가 아니면 비계 많은 고기를 쓰는가, 깊은 맛을 내는 국물인가 아니면 색만 뽀얀 국물인가 등. 내가 아는 제대로 된 돼지국밥의 소양은 모두 전자다. 여기에는 국밥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다. 바로 국밥이 패스트푸드라는 사실이다.

 

돼지국밥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역사를 들자면 한국전쟁 이후 가난과 일에 치이던 빈곤한 노동자들이 국밥 한 그릇 빠르게 말아먹고허기를 털어낸 뒤 일상의 전장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식은 된밥(진밥은 식으면 떡이 되므로)과 편으로 막 썬 고기를 뚝배기에 담아, 가마솥에서 펄펄 끓는 국물을 붓고 빼기를 여러 차례-이를 토렴이라 한다-, 밥과 소면은 물론이고 뚝배기까지 뜨듯하게 데워지고, 손님이 앉은 지 단 몇 분 만에 딱 먹기 적당한 온도의 식사로 갓 무친 싱싱한 정구지(정구지를 미리 무치면 국밥과 어울리는 성질을 완전히 잃는다)와 함께 상에 올랐다는 얘기다. 고단한 몸과 주린 배를 잠시나마 달래기 위해 어떤 일꾼이 뚝배기에 얼굴을 묻고 국밥을 삼키는 모습이 그려진다. 설렁탕이나 소고기국밥 등 대부분의 역사가 깊은 국밥이 그러하듯 돼지 국밥에도 이와 같은 서민의 애환이 서려있는 셈이다. 요즘 국밥집에 가보면 상당수의 가게에서 숟가락 대기가 두려울 정도로 지독하게 뜨거운 뚝배기를 내는데, 솔직히 음식 고유의 특성을 잃은 것이 아니냐는 의심마저 든다.

 

국밥의 정체성에 대해 왈가왈부가 길어졌는데, 어차피 어떤 음식이든 내 입맛에 맞고, 맛있으면 장땡이다. 돼지국밥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내 입에 꼭 맞는 국밥을 내주는 단골집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요즘 같이 포근한 낮, 스멀스멀 은근하게 빠져나가나는 기운을 보충하기 위해, 살짝 싸늘한 저녁을 틈타 단골집에서 돼지국밥에 소주를 곁들이는 것은 어떨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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