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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 넘기는 소리05]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_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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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9-03 13:10 조회3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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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 넘기는 소리05]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지하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두 거인이 있었다. 그리고 중세에 이르면 두 거인은 하늘을 떠받치는 아틀라스로 변한다. 그들이 신학을 위해 어떻게 이용되고 극복되는지 알아보자.

 

 

  "일자가 흘러넘쳐서, 그 충만함이 새로운 것들을 생산한다." - 플로티노스 ( 205 ~ 270 )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신플라톤주의자였던 플로티노스는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플라톤의 사상을 더욱더 합리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로 해석하는데 주력한다. 플로티노스의 철학은 일자(一者) 개념에 집중되어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가 이성적 사유의 대상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가 순수 사유의 이성이라면, 플로티노스에서 궁극의 존재는 이데아도 아니고 순수 사유의 이성도 아니다. 사유는 사유자()와 사유대상(이데아), 이성과 이성대상이 구분되는 이원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플로티노스는 궁극적 존재를 일체의 이원성을 넘어선 불이(不二)의 하나인 일자(一者)로 규정한다.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일자는 일체 존재 사물의 원천이다. 또한 일자는 모든 존재를 포괄하는 전체이다.(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전일(全一)적인 세계 개념을 떠올려보라.) 완벽하고 충만한 일자의 흘러넘침, '유출'로부터 세계는 만들어진다. 일자정신영혼의 순서로 유출되며, 영혼으로부터 물질이 나온다. 이렇게 플로티노스는 플라톤의 이원론이 갖는 모순(상호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세계의 종합 문제)을 우주의 연속된 계열 형태로 제시함으로써 해결한다. 이후 중세의 신학자들은 그의 일자를 하느님으로 치환하였는데, 이는 하느님에게서 모든 존재가 기원했다는 신학적 설명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보편자와 개별자 보편논쟁

 

  중세에 이르러서는 유()나 종()과 같은 개념들에 해당하는 실재의 존재 여부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 보자. 여기 맥도날드의 빅맥이 있다. 이것은 많은 햄버거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우리는 빅맥을 보고 어떻게 빅맥이 햄버거인줄 알 수 있는 것일까? 햄버거의 이데아가 실재하기 때문일까?

  보편자가 존재하고 그 이후에 개별자가 존재한다는 입장을 ‘(보편) 실재론’, 오직 개별자만이 존재하고 이들의 통칭하여 부르는 개념상의 이름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을 유명론이라 한다. 이는 중세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만일 개별자들보다 앞선 보편자가 없다면 우주는 잡다한 것들의 혼돈 속에 빠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자의 존재를 인정해야 질서정연한 우주관을 정립할 수 있다. 그리고 보편적인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를 확립할 수가 없다. 만일 보편 인간, 보편 원죄를 부인한다면 개별 인간, 개별의 죄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중에서 누구를 선택하는가의 문제가 생긴다. 플라톤은 보편이 실재한다고 말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편은 개개의 사물에 내재하며 개별적인 사물이 실재라고 믿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인식 차이에서 보편은 사물에 앞선다보편은 사물 안에 존재한다는 차이가 발생한다. 이를 각각 개념 실재론, 온건 실재론이라 부를 수 있다. 개념 실재론과 온건 실재론은 신앙과 이성, 다시 말해 믿음과 앎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인가 하는 것이 쟁점이다.

  그러나 유명론은 온건한 실재론조차 고려하지 않는다. 보편 개념은 사물에 앞서서도 또 사물 안에도 존재를 가지지 않고, 그 자체는 단지 인식 주관에만 존재하는 단순한 사고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스콜라 철학 시기인 중세에 모든 학문은 신학의 하위 개념으로 여겨졌다. 이는 실재론의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재론에서 모든 것은 하나()로 통하게 되어 있다. 실재론이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꾀했다면 유명론은 신앙과 이성의 분리까지 발전한다. 신앙은 신앙이며, 앎은 앎이라는 이야기였다. 따라서 이성을 추구하는 학문은 더 이상 신학의 하위 개념에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중세 스콜라 철학의 마지막에 등장한 유명론이 사람과 이성을 강조하는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뱀

 

  중세라는 긴 시기를 구렁이 담 넘듯 뛰어넘었다. 많은 이들이 중세를 암흑기라고 생각하지만 철학사에서 존재론이 가장 활발하게 논의된 시기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다만 신학적 색깔이 짙고 너무 무거운 주제이기 때문에 오늘의 보편논쟁으로 퉁쳐버리자는 유혹에 빠져버렸다. 어쨌든 우리는 은근슬쩍 중세를 뛰어넘었다.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과연 헤르메스께선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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