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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독감’ 20년 후 세계는: 『스테이션 일레븐』_정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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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7-20 13:05 조회6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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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연

문학을 공부합니다. 종말과 그 이후를 다룬 서사에 특히 관심이 많습니다.

heeyeon117@gmail.com

 

 

 

감염병이 휩쓸고 지나간 후, 비행기는 멈췄지만 공항에는 ‘박물관’이 생겼다: <스테이션 일레븐>(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2014)

 

지난 6월부터 방영 중인 <비긴어게인 코리아>의 첫 버스킹 장소는 인천공항이었다. 1년 전 같은 공간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적막해진 그곳이지만, 여전히, 묵묵히, 그 어느 때보다 고되게 일하고 있는 직원들이 있었고 제작진은 그들에게 위로의 음악들을 선사했다. 지난겨울 이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이하 코로나19)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무언가를 찾기가 더 힘들겠다만, 항공 업계가 특히 직격타를 맞은 건 사실이다. 금융위기 당시에도 큰 피해를 보지 않았고 꾸준히 증가세를 이어왔던 항공운항이지만, 지난 4월 전 세계 항공사 매출은 94%나 감소했다고 한다.1)

그러나 한편으론 항공운송 때문에 코로나19의 빠른 확산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2003년 사스 확산 과정을 연구한 프랑스-미국 공동 연구진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열린 최근 강연에서 필리프 상소네티 미생물·전염병학과 교수도 항공 노선과 바이러스 확산의 연관 관계를 지적했다.2) 기민하게 전 지구적 사태를 살펴 (그 사이에 또!) 책으로 제언한 슬라보예 지젝도 우리는 코로나19를 유행하게 만든 사회적 조건을 자세하게 분석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보라고 덧붙인다. “오늘날처럼 서로 연결된 세상에서 한 영국인이 싱가포르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영국으로 돌아온 뒤 프랑스로 스키를 타러 가서 다른 사람 네 명을 감염시키는 경로를 떠올려보자. 유력한 용의자들이 심문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대기하고 있다.”3)

역사 곳곳에서 그리고 오늘날까지의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공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소설에서 역병(감염병)은 인류를 위협하며 두려운 미래를 열어젖히는 주요 소재였다. 포스트-아포칼립스 장르의 시초로 여겨지는 메리 셸리의 <최후의 인간>(The Last Man, 1826)에서도 인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건 여태껏 밝혀진 바 없는 역병이었다. 오늘 내가 소개하려는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의 <스테이션 일레븐>(Station Eleven, 2014)에서도 인류의 절반 이상을 앗아간 것은 ‘조지아 독감’이다.4) 작품 속 조지아 독감은 코로나19와 마찬가지로 호흡기 관련 질환이며 감염자와의 접촉을 통해 전염되지만, 잠복기가 짧으며 발병 후 수일 내에 사망에 이르는 시간도 짧다. <스테이션 일레븐>은 여느 포스트-아포칼립스 서사들이 그러하듯 생존자들의 여정이 중심 내용에 해당하지만, 나는 이 작품이 첫째, 기술 발전에 따른 항공 운행과 바이러스의 급속한 전파를 흥미롭게 엮어낸다는 점, 둘째, 경유지로서의 공항이 아닌 정착지로서의 공항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스테이션 일레븐>은 아서 리앤더라는 왕년에 잘 나가던 헐리우드 배우와 연관이 있는 생존자들―대표적으로 커스틴, 지반, 클라크를 꼽을 수 있으며 그 외에도 여럿 있다―이 문명의 몰락 20년 후를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그들은 아서를 중심으로 모두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총 55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장마다 그들 각각의 이야기를 펼쳐가는데 문명 몰락 전과 후를 오가는 식이며, 독감 후 생존 자체가 절박했을 20여 년은 괄호쳐져 있다(이러한 구성에 대해 평자들의 호불호는 갈린다). 커스틴은 아서의 마지막 공연 <리어왕>에 함께 했었던 아역 배우였고, 현재 오대호 주변을 돌아다니며 셰익스피어 희곡을 공연하는 유랑악단의 일원이다. 지반은 파파라치였다가 연예부 기자가 되었고, 아서가 마지막 공연에서 쓰러졌을 땐 응급 구조사가 되려 준비 중이었는데, 그는 조지아 독감이 온 세계를 휩쓸기 직전 의사인 친구의 연락을 받아 마트에서 물건을 사재기한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클라크는 아서가 배우를 꿈꾸던 20대 초반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이며 문명 몰락 전에는 조직심리학자였다. 그는 토론토행 비행기에 올랐다가 조지아 독감의 여파로 명칭조차 생전 처음 듣는 세번시티 공항에 불시착한 후 계속해서 살고 있다. 

살아남지 못했지만 중요한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아서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미란다다. 그녀는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작품 속 그래픽 노블 <스테이션 일레븐>을 그린 사람이다(어쩌면 <스테이션 일레븐>이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직접 확인해보시라). 미란다야말로 지젝의 말인 “기술적 발전은 우리를 자연으로부터 훨씬 더 독립할 수 있게 해주지만 동시에 다른 차원에서는 자연의 변덕에 더 좌우되는 상태에 이르게 했다”5)를 여실히 보여준다. 아서와 이혼 이후 스타의 부인이 아닌 글로벌기업의 중역으로 커리어를 다시 쌓은 그녀는 바쁜 업무로 공항, 비행, 호텔을 오가야만 했고, 연고도 없던 말레이시아의 한 해변에서 발이 묶인 채 생을 마감한다. 미란다가 죽기 직전 모든 공항은 폐쇄되고, 전화를 받는 영사관은 없다. 발전된 기술은 종말의 문턱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비행기를 타고 오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한편 생존자 클라크는 세번시티 공항에서 불시착한 사람들과 살아가며, 공항을 그들 삶의 터전으로 가꿔간다. 더욱이 공항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공간만이 아니다. 클라크가 문명박물관을 만들어내자 과거의 기억들이 온존하는 곳으로 덧입혀진다. 문명박물관의 전시품들은 텍스트 바깥의 우리에겐 너무 일상적인 것들이지만 텍스트 내부의 그들에게는 과거의 기적들에 다름아니다. 노트북 컴퓨터, 아이폰, 라디오, 전기 토스트기 등. 클라크는 문명박물관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특히 문명의 몰락 이후 태어난 이들에게 물건들의 용도를 설명해주면서도 그 물건들과 이전 세계의 관계에 관해서도 설명해준다. <스테이션 일레븐>에서 공항은 더이상 경유지가 아니라, 생존자들과 생존자들의 기억들이 다시 쓰일 미래를 기록해가는 정착지로 변모한다. 

사실 내가 <스테이션 일레븐>에서 비행기와 공항에 주목한 부분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해볼 여지들은 훨씬 더 풍부하게 흩어져 있다. 커스틴이 속한 유랑악단은 왜 정착하지 않고 돌아다니는가? 생존에 대한 절박함이 줄어든 시기가 설정되어 있다고 해도 공연이 어떤 의미가 가질 수 있을까? 게다가 왜 하필 셰익스피어인가(암시적인 답은 작품 속에 제시되어 있지만 각자 생각해보길 바란다)? 왜 이야기의 축에는 아서가 있는가? 작품을 소개하며 나는 지젝의 근간과 헐겁게 연결짓긴 했으나, <스테이션 일레븐>과 <팬데믹 패닉>이 공유하고 교차하는 명확한 지점이 하나 있다. 바이러스가 휩쓸고 지나간 이후는 절대 이전과 같진 않지만,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다. 희망은 있다, 특히 연대와 협력에 있다. 이건 작품이 전달하려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하며 지젝이 책 속에서 거듭하는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다.

 

 

 

1)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제142호 12면 참조.

2) 동일 자료, 동일 면. 

3) 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 강우성 옮김, 서울: 북하우스, 2020. 30면. 

4) 국내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스테이션 일레븐>, 한정아 옮김, 서울: 북로드, 2016. 

5) 3)의 책, 7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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