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민예총은 문화예술활동을 하는 부산의 예술인 단체입니다.

글빨

글빨

  • HOME
  • 글빨
  • 글빨

[철학사 넘기는 소리02] 또 파르메니데스?_지하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7-02 06:02 조회52회 댓글0건

본문

​[철학사 넘기는 소리02]

또 파르메니데스?

지하

 

 

또 파르메니데스?

 

  지난 시간 우리는 파르메니데스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을 만났다. 각자 조금만 고민을 해본다면 우리는 나름의 방법으로 파르메니데스를 파훼할 방법을 찾을지 모른다. 물론 가볍게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를 넘어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의 덫에 빠진 채 영원히 부동하는 일자(一者)’로 남아버릴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라는 벽 앞에서 고대인들이 어떻게 그를 극복하고 새로운 거인이 되려고 했는지 알아보자.

 

 

유물론唯物論의 아버지들 - 데모크리토스( B.C.460(?) ~ B.C.370(?) ) & 에피쿠로스( B.C. 341(?) ~ B.C. 270(?) )

 

  지금의 과학을 있게 한 건 바로 원자개념이다. 오늘날 우리는 앞에 놓인 허공이 텅 빈 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원자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원자론은 데모크리토스에 의해 제시되었다. 원자론의 경우, 각각의 원자들은 일자(一者)적이고 영원불멸한 실재인 것인데 원자가 부딪혀서 운동을 하려면 반드시 빈 공간이 필요하다. 즉 비존재가 도입되어야 생성이 가능해진다. 데모크리토스는 우주의 시작을 허공(비존재)과 이를 채우고 있는 원자(존재)라고 생각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원자의 운동은 영원히 존재하며, 시간상의 기원을 갖지 않는다. 이처럼 데모크리토스는 자연 그 자체로부터 세계를 설명하려고 했다.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계승해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 극복하고자 한다.(파르메니데스는 세상에 운동이나 생성따윈 없다고 했다. 있는 것은 계속 있는 것이어야 하며, 없는 것으로부터 올 수 없다. 없는 것은 이미 있지 않는 것이기에 우주에는 운동이나 생성 같은 것이 없다. 오직 일자(一者)만이 있을 뿐이며, 그것 자체가 존재이다. 그러니까 존재는 개념일 뿐이며, 파르메니데스에게 존재는 곧 일자였다. 일자는 완전히 연속적인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발전시켜서 원자허공미끄러짐으로 이어간다. 원자는 데모크리토스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적 특성을 고려해 부여한 것이다. 허공은 이 원자들이 서로 떨어져 있게끔 한다. 에피쿠로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미끄러짐(clinamen)’을 통해 이 원자들끼리 우연히 빗나가면서 서로 충돌해 새로운 합성체가 생겨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에피쿠로스는 우주를 변화무쌍하고 어떤 일들이 우연히 벌어지는 세계로 간주했다.

 

 

아무것도 있지 않다. 만약 있다 하더라도 인식되어질 수 없다. 만약 있고 인식되어질 수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전달)되어질 수 없다.” - 고르기아스( B.C.483 ~ B.C.376 )

 

  고르기아스의 이 세 명제, 특히 첫 번째 명제는, 얼마나 존재론적으로 진지한 명제인지 여부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무것도 있지 않다." 라는 명제는, 파르메니데스의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라는 명제가 함축하고 있는 직관적인 근본성에 견주어 볼 때, 전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저 명제들이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을 겨누고 있음은 명백해 보인다. 왜냐하면 "있다""인식되어질 수 있다."와 같은 양보절의 어법은 전적으로 파르메니데스의 그것으로 보이는 까닭이다. 그는 "아무것도 있지 않다. 만약 있다 하더라도 인식되어질 수 없다." 라는 명제를 정립함으로써, 파르메니데스에게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고 있다.

  그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아무것도 있지 않음은, 이 세계에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근원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있다 하더라도 인식되어질 수 없는, 설사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 하여도 인간이 가지는 인식능력의 한계로 말미암아 보편적인 지식이 포착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만약 인식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전달 수단인 언어 자체가 실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재(實在)를 전달해주지 못한다. 고르기아스에게서 로고스(logos)’란 내적본질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과 감각의 구성물, 언어이다.(로고스는 본래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다만 고르기아스의 논증은 어떤 의미에서 모순인데, 그의 논증을 사실이라고 가정할 경우, 그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주장했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고, 인식할 수 있어도 전달되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언어를 통해 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과 사물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그리고 고르기아스는 각각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와 동시에 파르메니데스를 극복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물론 찝찝함은 남아있다.) 이번엔 어느 쪽이 더 설득력 있는가? 물질인가, 언어인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