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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와 살기02] 골목을 오르는 법_이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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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6-25 10:04 조회2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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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와 살기02]

골목을 오르는 법

이기록

 

 

글이 써지지 않는 날은 집을 나서서 걸어간다. 계절은 변한다. 올해도 변함없이 여름이 되었다. 계절이 길을 따라 흘러가듯 삶의 길은 어디로든 흘러간다.

길은 흘러가야 길이다. 흐르는 것들 사이에서 흐르지 않는 것을 찾아 나선다.

골목을 오른다.

부산에서 처음 살던 곳은 골목의 틈새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어서 무언가 그리워지면 발길은 처음의 곳으로 향한다. 골목을 따라 계단은 이어져 있고, 계단을 따라 자라는 것들이 보인다. 기억은 한 움큼씩 자라나는 여름의 식물이다.

한 칸, 한 칸, 또 한 칸

아이들은 시간을 따라서 사라졌다. 시간은 원래 여유가 없기 때문에 관대하지 않다. 시간이 관대하지 않아 빠진 것들은 어디서 자라고 있을까,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난 어디에서 시작하는 것일까.

밖에서 바라보면 골목은 그저 하나의 길이겠지만 안에서 천천히 음미한다면 많은 과거의 흔적들이, 이야기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공간을 공유한 많은 이들이 언젠가 뒤돌아서서 아, 그래 여기에서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하던 곳이지, 처음으로 좋아하던 그 사람이 여기에 살고 있었지, 밤새 놀던 나를 찾던 어머니의 음성이 들리던 곳이었지 하고 천천히 뒤돌아 볼 수 있는 그런 추억이 살아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드라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지만 현실이 드라마가 될 수는 있다. 아주 오랜 만에 우연히 마주친 친구가 태권도 관장이 되어 있거나 맨발로 마주 걷던 사람이 낯이 익어 바라보면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 모두 골목에 상주하고 있는 기억의 잔재들이다.

이야기의 시대다.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여러 매체를 통해서 공유되고 확장된다. 추억은 파편적이지만 이야기는 지속적이다. 이야기의 근원을 찾아본다면 골목은 현재진행형으로 말을 걸어 온다. 말을 걸어 온다면 의미가 생긴다.

많은 골목이, 길들이 제 수명을 다하지 않고 사라졌다. 다행히 남아있는 과거의 모습들. 오랜만에 하나씩 그 이름들을 기억해내어 되새겨 볼 수 있을까. 여기에 살던 진희와 저기에 사는 혜정이와 길 건너 살던 양준이, 그리고 동네 노랑머리 아줌마가 걸어다니며 참견을 하던 동네는 구체적인 풍경을 굳혀준다. 어느 시점인지는 뚜렷하지 않지만 갑자기 떠오르는 것들은 이미지로 정제된다.

우리의 삶이 대단지의 욕망으로 변해가고 있을 즈음 기억은 어느 언저리쯤에서 희생당하고 있다. 공간을 공유한 기억들이 지속적으로 공간에 남아있을 때, 의미가 생긴다. 공간이 사라진다면 기억의 지층도 얇아져 사람들의 기억은 유랑의 민족처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시간으로 남을 거다.

골목을 따라 골목이 흘러간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만큼일까,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들이 관계를 이야기한다. 점점 소외되는 순간들에서 우리는 감정을 잃어버린다. 최선을 다해도 못 막는 일들이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시간들을 다잡는다. 길을 걷는다. 골목을 호흡한다. 골목에 설 때면 사람들과의 관계를 떠올릴 수 있다.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다. 그렇게 기억들을 넓어진다. 넓어진 기억 안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늦은 비가 내린다. 돌아갈 집에서 골목이 살아나 있기를 바라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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