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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세이> 야수와 벌레, 그리고 모자_박정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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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12-02 10:48 조회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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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세이>

야수와 벌레, 그리고 모자

 

 

박정웅

 

 

요며칠 우연찮게, 나는 상이한 갈래의 두 작품으로부터 카프카를 떠올렸다. 하나는 얼마 전 TV에서 본, 엠마 왓슨 주연의 미녀와 야수. 다른 하나는 황정은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에 수록된 단편 모자이다. 사실 카프카를 떠올린 맥락은 두 작품의 갈래나 기원이나 역할이나 아우라 만큼이나 상이하지만, 나는 이 자리의 우연찮음을 구실로 하여금 두 작품을 나란히 이야기해보기로 한다.

 

*

 

야수는 처음부터 야수가 아니었다. 나의 경우 어릴 적부터 동화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었음에도, 어디서 전해 들었는지는 몰라도야수가 내면의 아름다움을 볼 줄 모른다는 이유로 야수가 되었다는 배경서사를 모르지 않았다. 야수가 야수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은 단 한 가지였다.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받는 것.

그보다 내게 친숙한 그레고르 잠자에게, 이러한 조건은 희망고문도 못 된다. 프란츠가 실제로 일상에서 검소한 생활을 추구하는 인물이었는지는 알지 못하나, 변신만을 놓고 본다면 그는 희망조차 사치로 여겼음을 가늠할 수 있다. 그가 그려낸 그레고르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다는 점 빼고는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아침을 맞이했을 뿐이지만엄밀히 말해, 그의 여느 날이 불안한 꿈과 무관했다는 근거는 작품 속에서 찾아볼 수 없다그 결과는 벌레로 변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무턱대고 어디선가 던져진 결과, 책임은 그렇게 받아든 자의 몫이 된다. 받아든 줄도 모르고 받아들었다는 점에서, 폭탄돌리기 게임의 패배자보다 못한 그레고르. 그에게는 벌레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없고, 벌레가 되어야만 했던 이유가 없고, 과오도 없으며, 벌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조건도, 장미 한 송이의 꽃잎이 다 떨어지기까지와 같은 시간제한 따위도 주어지지 않는다.

 

*

 

이처럼 무지막지한 여건 가운데 한 가지 내 눈길을 잡아끄는 부분은, 벌레가 되어버린 그레고르 잠자에게서 당혹스러움의 감정을 느끼기 어렵다는 점이다. 나라면 스스로 벌레가 되어버린 상황 자체를 납득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발광하면서 괴성을 내질렀을 텐데, 그래도 변함없으면 차라리 납득해보기 위해서 별의별 기억을 다 더듬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을 텐데, 그레고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꼼지락거리는 셀 수 없는 다리들과 활 모양의 마디들로 나누어진 갈색 배를 보고도 조금 더 눈을 붙이고 나면 해결될 일쯤으로 받아들이고, 좀처럼 혼자 일어서기가 어렵자 아버지와 하녀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켜 세울 생각도 하고, 한 시라도 빨리 지배인에게 자신의 모습을 내비치고 싶어 안달이 난다. 자고 일어나니 벌레가 된 것치고, 이는 너무 태연한, 어찌 보면 뻔뻔하기까지 한 반응이 아닌가?

이 뻔뻔함을 주지하면서 변신을 읽고 있으면, 나는 어느새 모자가 되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벌레와 모자가 각각 어떤 증상, 또는 현상의 비유(원관념이 철저히 드러나지 않으므로 상징이라 기술하는 편이 적절할 테지만)가 아닌가 생각해보게끔 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의 공통분모가 어슴푸레 보이는 듯하다.

모자에서, 아버지는 자꾸만 모자가 된다. 집 안을 돌아다니다 벽에 박힌 못에 걸려 모자가 되기도 하고, 난데없이 냉장고 앞이나 마당에서 모자가 되기도 한다. 한번 벌레가 되고서는 그대로 죽음에 이르는 그레고르와는 변신의 방식이나 과정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만, 왜 변신할 수밖에 없으며, 어떻게 하면 변신의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그레고르와 같다. 모자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술에 절어 기절한 모습일까, 아니면 간질 발작이거나 일시적 치매 증상일까……. 질문에 질문을 이어가다 보면 결국 모자에 완전히 포개어지는 것은 모자뿐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고, 이러한 면을 놓고 보더라도모자변신은 닮아 있다. 독자가 모자의 아버지와 변신의 그레고르로부터 무엇을 떠올리든지, 아버지는 자꾸 모자가 될 뿐이고, 그레고르는 벌레로서 죽었을 뿐이다.

 

*

 

벌레가 된 그레고르의 태연함-뻔뻔함은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의 태연함-뻔뻔함은 과연 작가의 의도성이 다분한 태연함-뻔뻔함일까. 나는 그리 생각하는 편이다. 인물 의식의 개연성에 흠집을 내면서까지 작가가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는 정작 알 수 없지만, 어쩌면 그 선택은 변신을 불멸이게 하는 요건 중 하나가 아닐까. 따지고 보면 모자도 비슷하다. 2010년대 초반에 발표되었으니, 어느덧 발표 이후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가고 있지만, 모자는 여전히 읽을 때마다 새롭다는 느낌을 준다. 새롭다는 느낌. 같은 꿈도 꿀 때마다 낯설 듯이 어떤 작품은 읽을 때마다 새롭다. 그들 작품의 은유는 정확한 대상으로서 사회적 원관념을 포착해두고 있지는 않지만(그러므로 상징이라 기술하는 편이 적절할 테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오래, 나아가 매번 새롭게 읽힐 수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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