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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세이> 하품_박정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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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8-07 20:54 조회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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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세이>

하품

 

박정웅

  

 

정영문의 중편, 하품은 미궁 같은 소설이다. 딱히 좋은 의미도, 나쁜 의미도 아니다. 특정한 목적이 있어 덧붙이는 비유가 아니다. 작품을 읽은 사람이라면 무슨 말인지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을 텐데.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미궁 같은지 설명하기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미궁 같다는 비유에 의존하게 되는 면도 있고. 뭐 그냥 단순하게 말해보자면, 힘겨웠다는 말이다.

이전에 읽은 정영문의 소설은 모두 단편들이었다. 여러 작품 중에서도 파괴적인 충동이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정영문 특유의 비감정적이면서도 끝이 없을 듯 이어지는 문체는 그러나 비인간적이지 않고 유머러스한 것으로 내게 기억된다. 여기서 유머러스함이란 단순히 읽는 이를 웃게 만드는 어떤 성격이 아니다. 정영문이라는 인간이 갖는 비현실적인 인간성, 이라고 하면 충분할지 모르겠지만 그의 문장에는 그와 유사한 힘이 있다. 어떤 인간성이건, 인간성은 인간성이다. 그리고 문장에서 드러나는 그의 인간성은 매력적이다.

하품도 마찬가지의 인간성을 느낄 수 있다. 다만 그의 다른 단편들과는 다른,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심심함이 있었는데그건 아마도 이 작품이 다름 아닌 하품인 까닭일 것이다그 심심함은 역설적으로 작가의 유머러스한 면모를 엿보게 한다. 하품을 통해, 그는 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나에게 하품이전의 정영문과 하품이후의 정영문은 조금 다른 사람처럼 여겨진다. 후자의 정영문은 이러한 소설을 쓸 배짱이 있는 사람, 권태를 견딜 끈기가 있고 그렇게 또하나의 권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또는 그랬던 사람)으로 인식된다. 하품을 읽는 동안, 나는 그 덕분에 몹시 권태로웠고 때론 힘겹기까지 했다. 한여름 땡볕 아래서 책을 읽고 있어야 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물론 여기서 힘겨웠다는 감상은 호불호와 같은 이분법적 접근에 따라 자연히 불호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죽을 운명에 처해 있는 모든 삶이 한 동안 잊고 지낸 죽음이라는 미래를 목도하게 될 때 불편해지듯 자연스럽게 삶에 종속되는 감상일 뿐이다. 요컨대 애써 직면하고 싶지 않은 사실을 굳이 직면케 하는 작품, 하품은 그런 작품이다. 불편을 불편 그 자체로 형상화해냈던, 위대한 용기를 기초로 만들어진 여러 시와 소설이 그러하듯이.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언젠가 이런 문장을 읽은 적 있다.

 

정말 견딜 수 없는 건, 견디지 못할 게 없다는 것이다.

 

이게 랭보의 시나 산문에서 읽었던 것인지, 그를 주제로 한 영화에서 보았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저 랭보와 관련되어 있다는 근거 없는 인상만이 내게 남아 있다. 흥미롭게도 정영문의 하품은 여러 지점에서 저 문장의 뉘앙스를 불러일으켰다. 소설을 다 읽고난 지금도 내가 대체 무엇을 읽었는지, 그러니까 소설 속 두 인물이 구체적으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또는 어떤 목적 위에서 구성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아리송하지만 그렇다. 이건 마치 오래전 추석, 내가 시골 할머니댁에서 다른 모든 친척은 이미 잠든 새벽 네 시간 동안 큰아버지께 꾸중을 들었던 기분과 유사하다. 물론 작품 속 가 거의 동등한 비중으로 대화를 주고 받았다는 점에서 큰아버지의 일방적인 꾸지람과는 다르기는 하지만, 결국은 작가 한 사람이 구성한 대화를 독자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심지어 두 사람의 대화는 일인극에서 12역을 맡은 배우의 자문자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하간 나는 하품덕분에 기억하지 않아도 될 기억 속에 있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시간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 되었고, 지나고 보니 그것도 삶이었다.

미궁의 비유는 이러한 맥락에서 떠오른 말이다. 하품의 시작은 결코 미궁의 입구로 보이지 않았다. 미궁의 입구가 미궁의 입구로 보이면 누구도 쉬이 들어서기 어렵겠지. 시작은 충분히 현실적이었고, 이어질 서사를 궁금케 했다. 하지만 소설이 중반부를 향해 가면서, 결코 이 작품에 비현실적 정황이나 소재가 등장하지 않는데도 비현실성을 풍긴다. 그건 전적으로 작중 두 인물의 대화가 어딘가 비현실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물들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기는 한가, 싶어지는 것이다. 재밌는 건 소설 자체가 이미 거짓, 허구라는 점을 독자와 합의한 장르의 예술임에도 독자에게 이 같은 의문을 갖게 한다는 것. 일례로 작품 중간에 두 인물이 서로 이마를 맞대고생각에 잠기는 장면이 있다. 둘 이상의 사람이 이마를 맞대고 생각에 잠기는 장면은 말 그대로 머리를 모아 생각했다는 식의 관용구를 연상시키면서 독자에게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유발하는데 이게 또 그냥 가볍게 웃고 지나갈 만한 장면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두 사람이라면, 실제로도 얼마든지 이마를 맞대고 생각에 잠길 것만 같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사건은 확실하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오래된 그 사건을 확증한다. 하지만 죽는 일은 (비교적) 그렇지 않다. 적어도 아직까진 그렇다. 내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영문의 하품도 그랬다. 읽고 또 읽으면서도 내가 나의 위치를 종잡을 수 없었고, 언제, 어떻게, 무슨 근거로 끝을 맺을지 예측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 시간은 힘겨웠다. 소소하고도 의미심장한 말장난으로 종종 실없는 웃음을 짓게 됐지만, 삶이 그렇듯 죽을 일이었고, 우연한 만남이 그렇듯 헤어질 일이었다. 그러니까 하품은 하품 그 자체였다고 할 수 밖에.

 

 

- 글을 씁니다.

장르와 장르 사이에서 끓는점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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