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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에세이> 소설의 영토_박정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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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7-12 12:15 조회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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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영토

-김사과와 김유진, 백수린의 단편을 읽고

박정웅

 

 

김사과와 김유진의 단편만을 읽고 리뷰를 썼다면 아마도 나는 이 글의 제목을 소설의 외연이라 지었을 것이다. 김사과의 , 증기, 그리고 속도Rain, Steam and Speed는 사랑 혹은 죽음의 단상들(fragments)이라고 할 만한 형식을 갖춤으로써, 김유진의 비극 이후는 구분점으로써 기능할 수 있는 시각적 지표일테면 별표(*) 따위를 사용하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형식을 시도함으로써, 소설의 외연을 넓히는 느낌을 받았던 까닭이다.

하지만 백수린의 여름의 정오는 그러한 제목이 불충분하게 느끼도록 만든다. 김사과와 김유진, 그리고 백수린의 단편을 관통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형식으로 나아가기라기보다는 국경을 넘어서려는 글쓰기’, ‘세계적인 글쓰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사과의 작품은 뉴욕을, 김유진의 작품은 비행기와 목적지를, 백수린의 작품은 파리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물론 세 사람의 작품이 세계적인 글쓰기라는 공통분모를 지닌다는 판단은 단순히 공간적 배경에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 내가 느끼기에, 세 작품이 공유하는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상황은 거기나 여기나 별반 다르지 않아.”

김사과의 , 증기, 그리고 속도Rain, Steam and Speed의 화자는 죽기 위해 뉴욕에 왔다. 하지만 그녀는 릴케를 빌려 P에게 말했듯, 죽기 위해 이 도시에 와선 죽지 않고 살아간다. 월스트리트에서 잘려 실업자 신세가 된 포르투갈인 P도 마찬가지다. P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라도 뉴욕에서 꿋꿋하게 살아갈 것임을 고집하는 화자를 이해하지 못하다가도 결국엔 그녀를 떠나지 못한다.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며, 차마 고국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겪는 내적 혼란을 나는 누구에게선가 엿본 적 있다. 그건 내 주변의 수많은 청년 실업자들, 그리고 나 자신의 내적 혼란과 닮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수 없는 사람들, 이라고 할까.

김유진의 비극 이후속 인물 수인은 비행시간 50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이국적이지만 이국이 아닌 목적지를 향해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가 제주도로 추정된다는 점에서는 세계적 글쓰기로 보기에 무리가 따른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곳의 이국적 정취에 이끌렸다는 점, 그리고 옛애인 B와의 추억이 대체로 외국과 얽혀있다는 점에서는 결코 무리가 아니다. 김유진의 이 작품이 다른 두 작품에 비해 유난히 진하게 풍기는 냄새는 죽음의 냄새이다. 3인칭 화자는 이 작품 전반에 죽음을 암시하는 이미지를 흩뿌려놓다시피 하고 있다. 수인은 주위를 둘러싼 죽음의 냄새를 맡으며 엄마와의 시간과 B와의 시간을 번갈아 환기한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을 확인했을 때 땅을 뒤덮은 이끼 덕분에 축축하되 차갑지 않은 흙의 질감을 느끼며 수인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마치 낯선 여행지에 도착하고 나면 왠지 마음이 놓이는, 그 독특한 감정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백수린의 여름의 정오속 화자는 남편의 학회 발표회를 핑계 삼아 파리에 와선 스무 살 시절의 풋풋한 사랑을 돌아본다. 처음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사방에서 알 수 없는 언어가 들리는데도 낯설지 않는 게 낯설었던 그는 오빠의 친구였던 타카히로에게서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타카히로는 그에게 되레 죽음의 냄새를 옮기게 되고 그의 풋풋한 사랑은 끝이 난다. 이후 그는 잊고 있던 죽음의 냄새를 맡을 때면 타카히로를 떠올린다. 도쿄 지하철 테러 사건의 마지막 범인이 잡혔을 때, 9.11 테러로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을 때. 한편 파리에 와선 공교롭게도 타카히로와 만날지 말지 고민하는 사이 남반구의 공장이 붕괴되어 많은 섬유노동자들이 죽은 사건에 대한 시위를 목격하기도 한다. 그에게 타카히로는 사랑의 상징이자 죽음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세 작품의 인물은 모두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떠나고, 그 떠남은 죽음과 관계한다. 죽음을 향해 가고 싶어서 떠났든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떠났든. 어디서의 삶이든 한사코 뗄레야 뗄 수 없는 죽음을 확인할 따름이다. 이 확인은 거기가 여기가 되면 거기도 여기와 다르지 않다는 확인이며, 나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확인. 그리고 나는 언젠가 반드시 여기서 죽게 되리라는 확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끊임없이 미래의 영토를, 오늘이 아닌 내일의 영토를 지향해야만 하는 천형을 떠받든 존재일 것이다. 다만 소설의 영토란 외연처럼 넓어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옮겨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매순간 작가는 새로운 영토를 향해 움직여 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향해, 설령 내일의 영토가 오늘의 영토만 못할지라도 여기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작가는 간다. 영원히 증기를 내뿜으며 빗속을 내달리고 있는 터너의 기차처럼.

 

 

 

- 글을 씁니다.

장르와 장르 사이에서 끓는점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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