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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라는 신화-자연은 자연적인가?_수림修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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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5-10 22:29 조회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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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라는 신화  - 자연은 자연적인가? (1)

 

수림修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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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구태여 자의적으로 의식하지 않아도 일상 속에서 빈번하게 ‘자연’이라는 낱말과 조우하게 된다. ‘인공첨가제 없음’,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자연주의 육아’, ‘자연농법으로 재배한 쌀’, ‘자연환경’, ‘자연친화적 샴푸’, ‘자연과학’, ‘자연신학’, ‘자연스럽다’, ‘부자연스럽다’ 등등. 일반적으로 자연은 인위적이거나 인공적인 대상과 달리 작위적으로 무언가를 가하거나 더하지 않고 순수하거나 있는 그대로의 것을 의미한다. (미스터리 서클, 유령, 폴터가이스트, 자연발화 같은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쓰는 ‘초자연적’의 반대 뜻으로도 사용한다.) 현대에, 자연은 본성에 대한 것이며 규범적인 세계관에서는 보이지 않는 속성들을 가진 것으로 빈번히 간주된다. 자연에 대한 개념과 인식은 인류사에서 어떻게 의미화 되어 왔을까? 자연에 대해 고대인들은 어떻게 접근 했을까? 

고대 그리스에서 -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을 ‘자연철학자’라고 빈번히 명명한다. 이 시기에 쓰여진(혹은 전승된) 논문들의 제목은 <자연에 대하여 Peri Physeos>라고 쓰여있다. 엄밀히 접근하면 고대의 자연철학자들이 어떤 어휘와 논증으로 피지스(physis)를 정의 내렸는 지 직접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후대의 연구자들이 고대의 저술들을 재탐구 하면서 피지스의 여러 스타일들을 분류해놓았을 뿐이다. 고대의 정신에서 어떤 자연개념을 발견 할 수 있을까? 자연의 영어 nature의 어원은 그리스어 피지스의 라틴어 번역어인 ‘natura’이다. 물활론적 사고를 내포하고 있던 고대 그리스에서 피지스는 일자로서의 자연 존재자가 스스로 자신을 형성하고 살아 움직이는 운동 방식을 뜻하기도 했다. 피지스는 가시적 영역에 속해 있는 natura와 달리 더 포괄적인 개념이며 잠재적인 것과 발현된 것을 아우른다. 크게 분류해서 피지스는 사물의 기원, 시작, 생겨남, 되어감 성장 등을 의미하기도 했고 사물의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1차적 성격’. ‘실재적 본성’, ‘일반적 구조’ 등을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되기도 했다.

고대 중국에서 - 天은 의지를 지닌 개체적인 주재자主宰者로 간주된다. 이 때 天은 종교적 주재자로서 의미화 할 수도 있지만 안셀무스가 <본체론적 신존재증명>에서 선보였던 신 개념과 유사하게 상위 개념이 없는 궁극적인 개념으로서의 형이상학적인 天(이때의 천은 리理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으로 변화되어 갔다. 이러한 天에는 자연의 기본적인 작용이 발생의 개념을 낳게 됨으로써 우주를 끊임없이 스스로 재생시키는 영속적인 존재로 형용하여 유기체적 자연관을 이끌어 내었다. 인간과 자연은 직접적으로 연속 관계에 있게 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상호간에 경쟁이 아닌 긴밀한 상보적 의존성을 갖는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보편성을 가진 근원자로서, 원리로서의 피시스 개념과 궁극적 일자로서의 天 개념은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이 자연의 개념은 어떤 변천사를 겪어 오늘날의 의미작용을 획득하게 되었을까? 오늘날 사용되는 자연은 일반적으로 자연에 대해 탐구하고 있는 인식자의 주관과 독립해 있는 어떤 대상을 말한다. 생물체들, 산, 바다, 대지, 태양계, 은하계는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류가 창조해낸 게 아니라 처음부터 있었다고 간주한다.(어쩌면 인간은 빙하를 온찜질하고, 플라스틱을 생산할 목적으로 존재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발화 행위를 통해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이런 소박한 실재론은 어떤 특수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단지 우리 일상의 배경으로 작용한다. 빈번히 상용되는 자연의 이미지는 녹색이다. 일상에서는 자연물로서 환경이 소여되어 있다. 이러한 상식에 대해 논리적으로 가타부타 하는 것은 이 글의 성격이 아니다. 하지만 철학에서의 <자연>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자연 친화적’, ‘자연 보호’, ‘생태친화적’ , ‘자연휴양림’등 에서 쓰이는 자연은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자연주의(naturalism)'와 궤도가 다르다. 물론 철학은 일상을 떠나 외따로 독존해 있는 지적 작업이 아니기 때문에 일상 언어들과 연속적, 불연속적 의미관계를 맺고 있다. 가령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자연의 개념과 철학에서의 자연주의는 모두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 구획을 기준으로 둘의 관계를 의미화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전자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상식에 근거한다(혹은 상식을 형성한다). 후자는 자연과학과 철학의 관계에서 발생한 이념이다. 철학이 과학에게 존재론적 토대를 제공해야 한다는 관점이 아니라 철학과 과학은 동일하거나 적어도 철학이 과학적 세계관에서 발견된 지식들과 연속적 이어야한다는 입장이다. 이 세계관(과학과 과학적 세계관은 다르다. 후자는 우주에 존재하는 것이 한 가지 형태의 자연뿐이라고 주장한다.)을 극단적으로 몰고 나갈 경우 물리학, 생물학, 화학에서 발견(발명)된 법칙적 영역들 외 우주에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인간의 정신적 구조와 개인의 고유한 경험, 그 정신들이 모여서 형성한 국가나 공동체 같은 추상적인 단위의 존재자들도 모두 물리적 개체들의 운동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전에 인식주체의 배경과 무관하게 독존해 있는 현상이 성립될 수 있는가? 20세기 초 창발론, 현상학, 과정철학자들의 근원적 비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지식의 축적과 더불어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식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자연의 관찰자를 나누어 보는 관점이 문명의 기본값이 되었다. 주관-객관, 정신-물질, 자연적인 것-인공적인 것의 전형적인 이분법은 어떻게 발생하고 존속 되었을까? 고대서양에서는 파르메니데스의 실체론적 세계관(하지만 파르메니데스에게서 변증법적 요소도 찾을 수 있다.)과 헤라클레이토스의 연기(緣起)론적 세계관(헤라클레이토스는 무법칙적 생성 변화에 의한 혼돈 상태를 말한 것이 아니라 대승기신론의 진여문과 생멸문의 관계와 유사하게, 불에 비유해서 로고스를 중심으로 생성 변화를 기술한다.)이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기독교전통의 철학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은 객관적주의적, 실체론적, 본질주의적 세계관이었다. 서양 존재론의 주요 화두는 언제나 생성이 아니고 존재(being)였다. 왜 없지 않고 있는가?, 존재를 존립하게 하는 존재는 무엇인가?, 존재에 대한 지식은 수립 가능한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철학사는 주어-술어 논리구조에 맞추어서 실체-속성의 범주화를 내면화 했다. 이 범주의 체화는 보편자-특수자의 이항대립적 문제를 야기했고 특수자를 보편자에 존재론적으로 귀속시키려 했다. 보편(전체)이 특수(부분)의 토대를 이루어야 신에 대한 지식도, 주관적이며 1인칭적 접근만 허용되는 것처럼 보이는(실제로 그러한 지는 조사해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개별적인 마음을 넘어서는 객관적 지식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 속에서 근대적 의미의 자연과학은 탄생했으며 이 탄생은 이후 서양지성사에 거대하고 은밀한 제약을 걸게 된다. 그 제약이란 어떤 것일까? 이 글은 철학, 과학, 사회담론에서 나타나는 자연개념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담고 있다. 먼저 철학과 자연주의가 내적 연관이 있는 지, 있다면 그것이 필연적인지, 단지 우연적인지 진단하기 전에 1장에서는 근대적 세계관의 기틀을 마련한 데카르트의 철학을 살필 예정이다. 19,20세기 철학(분석적 철학에 한정하자면)은 거의 반-데카르트적 기획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의 유령은 성불하지 않고 내면화되어서 문제를 야기한다. 

 

참고문헌

강철웅(2001) 『파르메니데스 철학에서 퓌시스의 의미와 위상

 

수림修林 

연종학림 청명스님의 제자이다대승적으로 살아온 삶들에 눈길과 마음이 적어도 반쯤 집중되어 있다철학수행에 관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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