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민예총은 문화예술활동을 하는 부산의 예술인 단체입니다.

글빨

글빨

  • HOME
  • 글빨
  • 글빨

연극 - 압력솥과 무지개_손재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11-29 15:58 조회95회 댓글0건

본문

글빨 18.11.29 에세이

연극 - 압력솥과 무지개

손재서

 

 

사이코드라마를 창시한 모레노는 사람의 내면을 압력솥 모델에 비유해 설명한다.

여기 압력솥이 있다. 솥은 화덕에 걸려있고 땔감이 계속 공급되면서 내부는 끊임없이 끓어오른다. 이 솥에는 폭발방지를 위한 밸브가 있어서 내부의 압력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의 내면은 압력솥의 내부와 같다. 안에서는 모든 욕망들이 뒤섞여 끓고 있다. 먹는 것에 대한 욕망, 잠에 대한 욕망, 소유에 대한 욕망, 섹스에 대한 욕망…… 사람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욕망을 간직한 존재이다. 그러나 같은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모두가 다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 만인이 모든 욕망을 다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 간의 차이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이것은 우리가 타인을 바라볼 때 압력솥 외부로 표출된 욕망의 표현형만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압력솥 내부의 재료들은 모두에게 똑같이 주어지지만 밸브를 통해 빠져나와 표출되는 개인의 모습은 모두가 다르다는 것이다.

밸브는 허용 가능한 욕망만을 바깥으로 배출한다. 밸브의 허용기준은 두 가지다. 그 사람을 둘러싼 사회제도와 그가 가진 도덕의 잣대! 개인마다 허용기준이 다르기에 밸브를 통과하여 드러나는 욕망들이 다르고, 이렇게 드러난 욕망에 의해 그 사람의 개성이 만들어진다. 타자는 이렇게 드러난 욕망만을 인지할 수 있으며, 이 정보에 따라 타자들의 차이를 파악할 수 있다.

 

모레노는 연극이 밸브의 조절장치를 시험할 수 있는 무대라고 생각했다. 연극은 실제가 아니므로 당신은 평상시에 표출해보지 못했던 욕망을 이 무대에서는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다. 연극을 통해 한 번 바깥으로 표출되어 본 욕망은 이제 실생활에서도 표출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욕망이 된다. 평상시 억압되어졌던 욕망을 무대에서 연습해봄으로써 실생활에서도 표출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사이코드라마의 큰 전제 중 하나이다.

 

모레노는 배우를 자신의 압력솥 내부를 여행하며 욕망의 리스트를 만드는 구도자에 비유한다. 자연인으로서의 배우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제도와 개인의 도덕관념에 의해서 허용된 욕망만을 드러내는 개성적인 인격체이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의 배우는 훈련을 통해 밸브의 선택능력을 확장시킨 기능인이다. 배우는 대본분석과 연습과정을 통해 자신이 맡은 역할의 욕망을 발견해내고, 배우자신이 아닌 배역이 가진 욕망을 자신의 밸브를 통해 배출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다. 이 때 배우가 자신이 분한 역할로서 드러내는 욕망은 배우의 압력솥 내부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욕망들이다. 존재하지 않는 욕망을 찾아서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배우는 평생 내면으로의 여행을 통해 자기 내부에 존재하는 욕망들의 리스트를 작성한다. 이 리스트에 오르지 않은 (배우가 자신의 내부에서 찾아내지 못한) 욕망들은 무대 위에서 표현되어 질 수 없다. 어떤 배우들은 특정한 욕망이 분출되는 밸브를 예술적으로 다듬기도 하고(악역이나 희극에 특화된 배우들처럼), 어떤 배우들은 평생에 걸쳐 이 인물에서 저 인물로 변신을 거듭하기도 한다.

 

배우의 이런 연기 메카니즘에 의해 만들어지는 연극은 스토리텔링 구조에서도 이 메카니즘을 닮아있다. 작가를 둘러싼 사회제도와 그가 가진 도덕적 잣대에 의해 이야기는 만들어진다. 이야기의 핵심은 갈등이다. 갈등은 말썽이다. 말썽이 없는 이야기는 금방 지루해진다. 말썽은 서로 다른 욕망들이 만나 부딪힐 때 시작된다. 이야기는 압력솥 내부가 끓기 직전에 시작해서 말썽이 일어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과정을 보여주다 밸브를 통해 말썽이 분출구를 찾는 결말을 그려낸다. 밸브를 통해 대립된 욕망이 분출되고 말썽이 해결될 때 연극은 카타르시스를 경험케 하고 압력솥 내부가 안정을 찾는 것과 함께 관객도 일상으로 돌아간다.

 

카타르시스는 이 지점에서 사회에 보수적인 작용을 미칠 수 있다. 민중의 열망을 카타르시스를 통해 분출시켜 버리고 일상의 안정을 꾀하도록 유도하는 것, 연극이 여기에 기여한다면 우리는 연극을 왜 해야 하는가? 카타르시스로 끝나지 않고 욕망이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관객을 이끄는 연극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연극이 곧 사라지고 마는 무지개가 아니라 우리가 올라타고 ‘Over The Rainbow’로 넘어가는 디딤돌이 되려면 지금 연극은 어떠해야 하는가?

 

이게 연극에 대한 요즘 나의 고민거리라고 한다면 이것은 거짓말이다. 진정한 고민은 이 고민은 혼자 해야 하는 것인가 함께 해야 하는 것인가이다. 고민은 잠자리에서 해야 하는가 술자리에서 해야 하는가?

 

2018글빨에 실린 글삯으로 받은 군자금은 이런 고민에 쓰여졌다고 결산보고를 올리는 바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