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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의 소리_김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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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9-13 10:31 조회2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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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8.09.13 에세이

걸음의 소리

김석화

 

 

태연한 척 걸었다.

길에 핀 풀처럼 흔한 걸음으로, 가볍게 흔들리며 그렇게 걸었다. 때론 짓밟히지 않는 풀처럼 약간의 오기가 필요하기도 했다. 생각을 버리려 했는지, 생각을 벼리려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걸어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고 걷다보니 걸음만 남았다. 걸어온 길에는 어떤 흔적도 남지 않았고, 나보다 앞장선 길에는 어떤 기대도 걸지 않았다. 그래서 한 걸음, 한 걸음만 온전했다.

운전면허가 없어 웬만한 거리는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녔다. 이동 수단이 없어 열심히 걸었는지, 걷기 위해 이동 수단이 필요 없었는지는 모르겠다. 뚜벅이로 자신하며 그저 걸어 다녔다는 것.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것은 단순한 이동이었고, 어떤 때는 짧은 산책, 또 어느 날은 야심찬 운동 행위일 뿐이었다. 그동안 나의 걸음은 딱딱하고 편평한 직선의 길 위에 있었다.

나의 걸음이 그 길을 벗어나 땅을 만난 건 얼마 전이다. 걸음이, 걷고 있는 몸이 땅과 밀착할 수 있다는 것. 걸음과 걸음 사이 가뿐하고 안전한 틈이 끼어있다는 것. 공기를 가로지르는 보행의 리듬이 마음까지 전해지는 것을, 얼마 전에 안 것이다.

시작은 가벼운 산행이었다.

여름 내 무겁고 습했던 마음이 발까지 내려가 온 몸이 축축해질 무렵, 누군가 산행을 권했다. 산이 해결해 줄 거라고 했다. 그렇게 산을 오르내리고 갈맷길을 걸었다. 그 사이 뭔가가 해결된 건 없다. 다만 땅으로 꺼질 것 같았던 내가 계속 걸을 수 있다는 것만이 분명해졌다. 그리고 날을 꼿꼿이 세운 문제들에 지지 않았다는 것, 그것들과 함께 여전히 걷는다는 것. 그것만이 생생했고, 그거면 충분했다.

처음에 어떤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처음의 걸음이 다음의 걷기를 불러왔고, 기대하게 했다. 네 시간, 여덟 시간씩 걸으면 힘이 빠졌다, 들었다 했다. 뚜벅뚜벅 하는 사이 발가락이 자라는지 발끝이 아프고 무릎이 삐걱댔다. 그것이 왜 그렇게 기분 좋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를 포획한 푸른 감정들이 옅어지며 걸음만이 남아서 그랬는지 모른다. 비뚤고 가파른 산길을, 정상없이 이어지는 바닷길을 걷다 보면 걷는 것만이 중요해졌다. 한적한 산 내음, 바다 내음 속에서 마음도 생각도 덩달아 한적해졌다. 누군가는 걸으면서 생각의 날을 세우기도 하겠지만, 난 그러지 못했고 그러지 않았다. 햇빛과 구름 아래 한 사람이 걷고 있다는 것만 느꼈다. 나를 동여맨 어려운 문제와 감정들이 슬금슬금 풀어지고, 세상과 맞선 화가 이내 누그러진다. 예민해졌던 나는 아무 날에,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어 걷고 있을 뿐이다.

걷다 보면 처음에는 구겨졌던 공기가 펴진다. 직선의 햇빛이, 간간이 불어대는 바람이 꼬깃꼬깃한 공기를 순하게 만든다. 그리고 두 발의 웅성임이 들린다. 오른발이 왼발을, 왼발이 오른발을 쉼 없이 불러댄다. 발의 움직임이 느껴지면 운동화 속 발가락의 소리가 들리고, 공기를 가르는 팔의 휘적임이 들린다. 난데없이 몸의 감각들이 소리로 전해져 오면 소란스러운 머릿속은 다소 얌전해진다. 그렇게 몸이 하는 말을 듣고 나면 주변의 풍경이 느리게 나타난다. 풍경이 눈에 보일 쯤 목덜미를 타고 내리는 땀이 소리를 전해오고, 그 땀은 한여름의 그것처럼 전혀 귀찮지 않다.

걷기 위해 걸었던 그 길에는 신호등이 없다. 꾸준히 제 형태를 드러내고 있는 그 땅에서 내가 원할 때 잠시 멈추었다.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땀 한 줌을 닦고. 바람이 반가워 온몸으로 맞이하고. 나무뿌리, 돌부리를 보느라 고개를 숙여보고. 산길이, 바닷길이 내는 소리를 듣고. 잠깐 숨을 고르느라 멈춘다. 내 걸음의 속도를, 휴식을 그 길들은 나무라지 않았다. 고인 그늘을 잠시 내어줄 뿐이었다. 다행한 걸음들이 가을 속에서 자박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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