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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은 사내들_김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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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897회 작성일 18-06-21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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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8.06.21 에세이

수줍은 사내들

김석화

 

 

1.

어느 날부터 그가 보이기 시작했다.

운동 삼아 걸으려고 집을 나섰다가 수영강 다리에서 처음 보았다. 공기가 봄의 뒷자락을 붙들고 있던 때. 봄밤처럼 가볍게 풀어져 나풀거리며 걷다, 순간 멈칫했다. 한 사내가 지나간 겨울을 걸친 듯 누더기 옷을 잔뜩 껴입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주위로 작은 보따리가 몇 개 있고, 그는 느린 동작으로 짐들을 살폈다. 그 사람은 무채색을 띠고 있었지만 양각으로 도드라져 보였고 그 밤, 코끝의 공기가 잠시 얼어붙었다. 고층 빌딩과 아파트, 직선의 도로들로 둘러싸인 이곳. 반듯한 옷을 입고 늘 바쁘게 걷는 사람들로 가득한, 무채색도 아닌 색이 없는 도시 한 가운데. 여기서 노숙자를 만난 건 처음이다.

수직의 구조물과 직렬의 삶들이 숨을 곳 없이 뻗어있는 곳에서, 웅크린 채 앉아 있는 그는 마치 작은 매듭처럼 보였다. 어쩌다 묶여버렸지만 굳이 풀지 않아도 되는. 수줍게 묶인 매듭.

사내는 다 헤진 옷을 몇 겹이나 껴입고 있다. 얼굴도 여러 겹의 천으로 감싼 채 늘 숙이고 있어 본 적이 없다. 돌덩이처럼 앉아 있거나 작은 동작으로 움직일 뿐이다. 그리고 밤에만 나타나, 늘 강이 보이는 쪽에 앉아 있다. 그 밤 이후 자주 마주친다. 이제 내게는 그가 낯설지 않다. 나는 걷고 사내는 앉은 채 도시의 밤과, 온도가 바뀌어가는 바람을 공유한다. 그는 하나의 야경이 되었고 나는 그를 지나칠 뿐이다. 다만 매듭 앞에서 손이 멈칫하듯 그를 보면 마음이 잠시 박자를 놓친다.

그는 무리에서 벗어나 있다. 역 주변을 배회하지도, 소주를 들이키지도, 구걸을 하지도 않은 채. 그렇게 혼자다. 차들만 요란하게 다닐 뿐 사람은 많지 않은 곳에 작은 짐을 풀고, 최소의 형태로 있다. 어둠으로 앉아 밤이 되어간다. 그 다리 위에서 밤처럼 번져간다. 광안리 바다까지 투닥투닥 걷고 돌아오는 길에 커피를 샀던 어느 날. 마시지도 않을 커피를 사고서야 내가 그 사내에게 뭔가를 건네고 싶어 하는구나 생각했다. 그 사람이라면 주는 것과 건네는 것의 미묘한 차이를 알아채지 않을까. 그를 가끔 떠올려본다. 그러면 괜스레 호흡이 느려지고 신경질적인 감각들이 다소 온순해진다. 걸음이 밤을 향하고 그가 어제처럼 있기를 바래본다. 몇 걸음 이내로 지나치겠지만, 또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기를.

밤을 뭉쳐놓은 덩어리 같았던 당신의 등을 보았습니다.

멈칫하는 발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쾌활했던 저의 걸음을 당신은 보았습니까.

여름밤도 그렇게 수줍은 듯 점유할 건가요.

어느 날 키 작은 여자가 불쑥 커피를 내밀거든 등을 펴고 받아주세요.

 

2.

이어폰을 끼고 지하철역을 향해 걷던 오후였다. 볕이 그대로 내리쬐는 고층 빌딩 앞을 지날 때. 어디선가 나를 향해 손 하나가 다가왔다. 걸어갈 때 보이지 않았던, 분명 보지 못했던 남루한 겨울옷 차림의 키 작은 사내가 수줍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저기요. 여기 무료급식소가 어디 있어요?

그는 순한 표정으로 센텀 시티에서 무료급식소를 찾고 있었다. 다리 위의 사내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걸음과 마음이 순간 정지했다. 이 동네에는 없다고 했더니 그럼 부산진역에 급식소가 있다는데 거기는 어떻게 걸어가느냐고 다시 물었다. 걸어간다니. 금방 쓰러질 듯한 몸으로. 함께 지하철을 탈 생각으로, 거긴 너무 멀어서 지하철을 타야 한다고 말했다.

난 차비도 없고 이틀을 굶었어요.

내 앞에서, 나를 향해 이틀을 굶었다고 그 사람이 말하고 있다. 그 손은 수줍은 손이 아니라 힘이 없는 손이었고, 순한 표정은 힘을 빼앗겨 그저 표정이 없을 뿐이었다. 그런 사람이 그 곳까지 걸어간다고 길을 묻는다. 지갑에 있던 만 원과(지폐가 남아있던 걸 얼마나 다행으로 여겼던지) 가방 속 작은 빵 하나를 건넸다. 이거면 며칠을 살 수 있다는 그의 말을 뒤로 하고 나는 다시 걸어갔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가 어느 방향으로 걸어갔는지 알 수 없다. 그냥 뒤돌아보지 말아야겠다고만 생각했다.

더위가 짙어지는 한낮에 겨울을 등에 진 채 나타난 사람. 만 원을 건네받을 때 희미하게 웃었던 사람. 어느 계절을 떠돌다 온기 없는 이곳까지 왔을까.

 

3.

나는 뒤돌아봐야 했을까. 다리 위에서 잠시 멈추어야 했을까.

그들에게 지나치는 사람들은 행인1.이면 충분할까. 아니면 그들도 관계의 건너에 있는 어떤 사람을 원할까. 그 두 사내의 등장이후 맴도는 물음들.

살아서 백골이 되어가는 듯한, 희기도 하고 검기도 한 그들.

온순한 짐승처럼 등을 구부리고, 최소의 면적을 차지한 채 있던.

그림자를 숨긴 그들과 함께, 나도 그림자를 숨긴 채 나란히 서고 싶었던.

어디에 있다 여기로 왔나요. 이제 어디로 갈 건가요.

무더운 한낮 당신들의 그늘을 발견하기를, 여름잠이 조금이나마 시원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