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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목소리_김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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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922회 작성일 18-05-24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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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8.05.24 콩트

단 하나의 목소리

김석화

 

 

감정의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와 집요하게 나를 건드린다.

죽은 이의 빈소에서 문득 당신의 목소리가 듣고 싶네요.

어제 밤, 이 단 하나의 문장으로 이제 이것은 살점을 파고들 준비를 한다.

처음이 아니면서 처음인 것 같은 이것은 너무나 통속적이다. 세상의 먼지처럼 흔해서 외면하면 털어버릴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외면하지 않고 그 감정들을 맞는다. 그 먼지같이 부유하던 감정이 내게로 자꾸 쌓인다. 쌓이는 먼지를 흠뻑 뒤집어쓴다. 먼지인 채로, 그 감정이 나인 채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죽은 이의 빈소에서 문득 당신의 목소리가 듣고 싶네요.

이 말을, 문장을 하루가 지나지 않는 동안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다. 쉽지 않은 말이다. 평소처럼 이모티콘 하나 넣지 않고 쓴 단정한 말이다. 즉흥적이지만 무언가를 꾹꾹 눌러 담은 말이자, 부드럽고 단호한 온점의 문장이다. 웃음도 눈물도 없는 단 하나의 말.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이 간결한 말은 침처럼 나를 찌른다. 그래서. 불쑥 눈물이 솟고, 이 쉽지 않은 말은 내게 스며들어 온종일 내 몸을 통과한다.

그는 친구의 부친상에 문상을 간다고 했다. 고향 친구들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을 것이다. 일상의 말들과 늙음과 죽음에 대해 상투적인 말들이 오가는 동안, 소주잔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그는 점점 불콰해졌을 것이다. 빈소의 애매한 공기와 검은 옷들의 어중간한 몸짓과 자리를 잡지 못한 말들의 소란함 속에서, 그 속에서 내 목소리가 듣고 싶다고 했다.

죽은 이의 빈소에서 내 목소리를.

그동안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것은 내 목소리를 들려준 일일 텐데, 나는 갑자기 내 목소리를 들려준 적이 없다고 여겨진다. 차갑고 미지근한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목소리는 들려준 적이 없다. 휴대폰으로 나눈 대화는 이모티콘들로 목소리를 지웠고, 술집에서 나눈 말들은 술로 나의 목소리를 지웠다. 우리 사이에 말들이 떠도는 동안 나는 한없이 느린 내 목소리를 의식하지 못하고 많은 말을 했다. 그의 얼굴이 내 앞에 있었고, 내 말을 들어주고 웃어주었기에. 나는 내가 아닌 듯이 말을 하고 또 했다.

말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싫어 누군가와 둘이서만 있는 것조차 무서워하던 내가.

내가 그렇게 그 사람 앞에서 말을 쏟았다.

쏟아진 말들이 떠돌다 가라앉던 시간들. 내 목소리는 어디로 간 것일까.

나는 그의 목소리, 웃음소리, 기침소리를 기억하는데.

내 목소리는 어디에 닿은 것인가.

 

죽은 이의 빈소에서 문득 당신이 생각나네요.

그의 목소리가 부끄러운 걸음처럼 다가온다.

전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전화번호는 내게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내 목소리를 들려주지 못했다. 얼굴을 지운 채, 이모티콘을 지운 채 들려주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술집의 느릿한 전등 아래가 아닌 한낮에, 나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다. 꾹꾹 누른 말들을 문자로 전하는 대신 불쑥 전화해 밥은 먹었냐고 묻고 싶었다.

이 감정들에게 살점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

나의 감정은 이십대의 그것처럼 생기 발랄 할 수 없으므로. 달큼한 향을 풍기고, 클클대며 수시로 터지는 웃음을 흘릴 수 없으므로. 우리 사이의 말들은 신변잡기적이어야 하며 느낌표 따위는 허락되지 않으므로. 존칭과 경어로 예의를 지켜야 하는 우리에게 이 상투적 감정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으므로. 이 낯설고도 익숙한 감정은 나이 든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으므로. 우리의 것이 아니기에. 그저 살점을 내어놓을 수밖에.

하마터면 그 말을 할 뻔 했다.

여행지에서 쓴 엽서가 삼 개월 후쯤 도착할 거란 말에 그냥 사진으로 찍은 엽서를 보여 달라고. 어린 여자아이처럼 말할 뻔 했다. 그 곳에서 나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 샀다는 그 가방을 선물 받았을 때 하마터면 물을 뻔 했다. 당신의 가족 것도 샀느냐고. 뻔하고 유치한 내 마음을 전할 뻔 했다. 나는 그에게 여자가 아닌 사람의 형상이기에, 이 감정 앞에서 유치해지지 않으려 마음을 자르고 또 자른다.

처음으로 나를 단 한번 당신이라고 불러준 사람.

처음으로 나의 쓰고 쓴 기억을 털어놓게 한 사람.

그 사람에게 내 목소리를 전하지 않기 위해 나는 내 살점들을 오늘도 내어놓는다.

 

 

 

- , 영화, 쓰기에 집중하며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