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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한 거리_김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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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856회 작성일 18-05-09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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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8.05.10 칼럼

평등한 거리

김석화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사람들은 각자의 모습으로 구분되고 개별화되어 존재한다. 이 존재하는 사람은 외형적으로 성별, 나이, 인종, 외모 등으로 다른 사람에게 가시화된다. 드러나는 모습은 천차만별이고 그 다양함은 무수하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알아보는 사람의 모습에서 그 다양함을 인정하면서도 성별은 왜 두 개로만 보여야 하는지 우리는 질문하지 않는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중 같은 모습은 없지만 그들은 남자이거나 여자다. 두 개의 성 또는 젠더에 포획되지 않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거리에서 그들은 가시화되지 않고 사람들은 그들이 보이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엔 명확하고 수용가능한 성 정체성으로서의 남자와 여자만이 걸어 다닐 뿐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어느 존재이거나 남녀 외부의 존재이거나, 남녀가 섞인 존재, 혹은 맞지 않는 성과 젠더를 걸친 존재는 평등한 거리를 갖지 못한다.

성 정체성의 이분법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어느 거리를 걷고 있는 걸까. 현실에 살고 있지만 그들은 공적 공간에 드러나지 않고 출현하지 못하는 존재로 있다. 수행성을 결박당한 채, 활보하는 걸음을 멈춘 채 사적 공간에 은폐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인류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젠더 정보를 게시하지 않거나 실제와 다르게 게시하는 것은 사회규범의 심각한 위반으로 간주되고 있다고 말한다. 신분 사회에서는 공적 공간에서 정체성 정보의 게시가 의무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자신에 대한 정보를 선택적으로 또는 실제와 다르게 게시하는 것이 허용되는데 젠더 정보만이 예외라는 것이다.

이것은 퀴어와 구별되고 분리되기를 바라는, 규범을 장악한 자들의 조악하고 오만한 태도를 드러낸다. 이들은 정상의 서사퀴어의 서사에 가차 없는 가위질을 해댄다.

존재와 나타남이 분리되어버린 자들. 자기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발언권을 빼앗긴 자들. 젠더 정보 게시의 압박과 동시에 억압, 차별,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린 자들. 이중의 이름과 이중의 모습을 걸치고 연기 없는연기자가 된 그들. 다양한 퀴어의 개별적 모습은 사라지고, 다만 여자이거나 남자가 되어 거리를 걸어 다닌다.

성적 지향을 바탕으로 한 성 정체성이 공적 공간에서 전시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퀴어는 자신의 서사를 말할 기회를 가지기 힘들고, 장소를 지정받기 어렵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는다.(퀴어문화축제와 프라이드 영화제가 있기는 하지만 자연적인 마주침의 기회는 흔하지 않다) 존재하지만 있지 않은 사람들.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밝힌 나는 타인에게, 타인은 나에게 현상하는, ‘현상하는 공간으로써의 이 사회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현상하지 않는 존재들인 것이다.

김현경은 하나의 사실인 인간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성원권은 일종의 자격으로 타인의 인정을 필요로 한다. 즉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개인이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하며,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퀴어는 인간이라는 자연적인 사실 문제 외에 사회적 인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사회는 그것을 거부한다. 그들의 이름을 지우고 자리를 없애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매일의 통증을, 머뭇거리는 걸음을 둔하게나마 떠올려본다. 사회가 차별금지를 공적 담론으로 세우지 못할 때, 우리는 개인으로 다가서야 한다. 개별적인 존재로 걸음을 떼서 종내에는 함께 걸을 수 있도록. 퀴어의 존재가 사회에 현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꿈꾸지 말아야 한다. 퍼포먼스적인 환대나 지식을 갖기보단 작은 것에서 시작하는 것. 그들이 자신에 대해 말할 때 서사의 내용과, 그 주체를 인정하는 몸짓으로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 자리를 마련하는. 영화 <문라이트>에서 흑인 소년이 리틀’, ‘샤이론’, ‘블랙으로 불리며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동안 후안과 테레사는 그저 곁에 있어주었다. 처음에는 누구인지를 물었으나 소년이 말을 하지 않자,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를 행했다. 그가 말하기를 기다리고 들어주며 인정하는 몸짓을 보였다. 소년은 그 환대의 공간에서 아픈 마음을 쉬게 한다.

그들의 간헐적이며 지속적인 통증을 더불어 경험할 수는 없다. 그러나 환대의 마음과 몸짓을 연습하고, 이 거리를 함께 나눌 수는 있다. 그들이 실제 이름과 만들어진 이름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고, 온전하고 온기 있는 자리와 장소를 가지기를 희망한다. 프라이드와 존엄성을 동시에 가지며 환대의 대상이자 환대의 주체가 되기를 또한 같이 이 거리를 활보하기를. 이 사회가 평등한 거리가 되기를. 나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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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쓰기에 집중하며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