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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절기의 토요일_이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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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2-09 11:40 조회28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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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8.02.09 짧은 소설

환절기의 토요일

이세윤

 

 

계양역에서 택시를 탔다. 쌀알 같은 작은 눈이 바람에 날리며 차창에 부딪혔다. 부딪히고는 금세 녹아 물방울이 사선을 그리며 흐른다. 초봄에 내리는 눈이란, 뒤늦은 고백처럼 묽게 질척인다. 강을 가로지르는 대로를 지날 때 호진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을 꺼냈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메시지를 보냈다. 아직 점심시간 전이라 전화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곧 도착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작은 섬처럼 들어선 신도시가 멀리 눈에 들어 왔다. 스노우볼 안의 아담한 마을처럼 예쁜 도시다. 일 년 전 이 작은 도시로 들어온 호진은 개인 병원을 열었는데 가까이에 살 때보다 오히려 자주 그를 보게 된다. 인천 공항으로 들어올 때마다 그의 병원이 자리한 작은 동네를 방문하고 싶어진다. 공항 지하철을 타고 그의 동네 앞에 다다를 때 결코 지나칠 수 없어 전철에서 내려 매번 그의 병원을 들른다. 캐리어에는 그가 좋아하는 사케가 실려있다.

 

병원에 들어서니 직원이 휴게실로 나를 안내한다. 그의 진료시간에 휴게실 테이블에 앉아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는 것을 나는 좋아한다. 휴게실 냉장고를 열면 언제나 더치커피가 여러 병 있는데 누가 배달이라도 해주는 것일까. 환자가 없을 때마다 호진은 휴게실로 넘어와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수다를 떨다가 진료실로 돌아가곤 한다. 내가 와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환절기를 맞이해 귀나 코가 막힌 어린이들이 줄줄이 대기실에 기다리고 있어 호진은 이쪽으로 넘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책장을 살펴보니 선재의 책들이 아직 많이 보인다. 세상을 떠난 지도 이제 이 년여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녀는 이 곳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다. 부재감이나 상실감이 호진에게는 어떤 것일까. 선명한 것일까.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아픈 감정은 언제나 손에 꽉 맞게 쥐어지지 않고 우리 주변을 맴돈다. 이 사람은 어쩌자고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많은 것을 남긴 걸까. 유품은 처분할 수 있지만 세상에 퍼져 있는 선재의 책은 불러들일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장에 꽂힌 책들마저도, 처분하기에는 애매하다. 그녀의 책들은 꼭 그녀에 관한 것만은 아닐 테니까. 오히려 다른 먼 곳을 바라보고 몰두해 온 흔적일 테니까.

 

콧물을 흘리고 기침하는 아이들이 많아 좀체 호진은 진료실에서 나오지 않는다. 대학시절 정신신경학과 전공의가 되어 소설을 쓰고 싶다던 호진은 지금 우울한 어른들보다 기침하고 칭얼대는 아이들을 더 많이 만난다. 정작 이비인후과나 차리겠다던 나는 도립의료원 정신과라는 한직에서 환자들의 상담을 받거나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며 비행기 안에서 용각산을 털어 넣곤 한다. 지난 가을, 담도에 종양이 발견되고 나서는 그 편안했던 일상도 요즘은 버겁게 느껴진다.

 

최근에 호진은 저소득층 어린이 보청기 지원법을 국회에 제안하고는 법이 통과되자 손수 그 사업을 추진하게 되면서 방송 출연이나 에세이 출판 제의가 많이 들어왔는데 그는 일체 그러한 요청을 거절한다.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곳은 귤현동 참조은 이비인후과 진료실뿐이리라. 어쩜 그리 스타 기질이 없는지.

 

점심시간도 건너뛰려나 보다. 환절기에 코감기, 목감기, B형 독감갖은 병들이 유행하는 법이다. 대기실에 어린아이 하나가 울고 있다. 삼십여 년 전 지금과 같은 환절기의 농활에서 지독한 감기를 얻었던 기억이 난다. 벽촌 주민들을 한명한명 진료하고 저녁에 숙소로 돌아오니 몸이 오슬오슬 추워지며 재채기가 났다. 농활 마지막 날을 맞이해 동네 주민들이 준비해 주신 충청도 증약 막걸리와 갖은 안주가 들어오던 참이었다. 아랫목에서 이불을 몸에 감고 사시나무처럼 떨며 구석에 박혀 있는데 호진이 다가와 내 체온을 쟀다.

 

. 아직 연락이 안돼?”

 

연락 없는 여자 친구로 마음이 쓰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로 나를 진단할 줄이야. 나는 대답 없이 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미 이십대에 백발이 다 된 호진은 항상 어른스런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 나의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너무 올바른 친구를 곁에 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질투심이 자주 일어난다. 돌아 봤을 때, 나보다는 호진이 선재에게 의지가 될 법도 했으리라.

 

엄마 말 잘 듣고, 아이스크림 먹으면 안돼요.”

 

대기실에서 호진의 목소리가 들린다. 주사를 맞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 호진이 내미는 새끼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건다. 환절기 토요일, 유호진 이비인후과의 마지막 환자는 그렇게 숱이 많은 백발의 의사가 보이는 관심과 사랑으로 조만간 병을 털어낼 것이다.

 

호진의 포드 자동차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한다. 가로수에 앙상한 나뭇가지들에 막 이파리가 솟아나는 분위기다. 반대로 고개를 돌리니 운전하는 호진의 옆모습이 부쩍 수척하다. 눈 아래가 어둡고 광대뼈가 유난히 나와 보인다. 환절기는 죽어가는 것과 살아나는 것이 공존하는 시간이 아닐까. 이미 살아있는 생명에게 있어 태어나는 생명의 기운은 아찔하게 다가온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꽃이 핀 모습은 아름답지만 내 마음은 요상하게 흔들린다. 흔들리며 살아 있는 나는 또 한 번 삶의 편에 편승해 잔존할 수 있을까.

 

 

 

- 글쓰고 그림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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