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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빨간 페라리_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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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2,117회 작성일 17-08-10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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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10 초단편소설

어느 빨간 페라리

김민수

 

 

나는 서킷에서 일하는 노동자이다. 경주용차는 빨리 달리는 것이 목표이고, 그 목표 때문에 늘 무언가를 부순다. 나는 경주용차가 부순 것들을 고쳐나간다. 깨진 연석을 시멘트로 메우고 그라인더로 깎아낸다. 타이어가 밟고 지나간 잔디밭에 새 잔디를 심는다.

서킷의 모든 것은 언젠가 부서진다. 맹렬히 달리는 자동차 앞에서 모든 것은 일회용이다. 그 때문에 서킷의 노동자들은 멀쩡히 재활용할 수 있는 것들조차 쉽사리 일회용으로 생각하곤 한다.

 

포디움 역시 일회용이다. 새하얀 층계가 진 포디움에는 각각 1,2,3이라는 숫자가 새겨져있다. 장내 아나운서가 우승자의 이름을 외치면, 우승자가 헬멧을 벗고 포디움에 오른다. 동료선수들은 샴페인을 터뜨린다. 나는 이교도들을 바라보는 얀센주의자처럼 무미한 얼굴로 그들을 지켜본다. 우승 세레모니가 끝나면 포디움을 부숴야하기 때문이다.

미화팀은 곧 부숴버릴 포디움을 청소한다. 어차피 부숴야하는 것이니 청소하지 않아도 좋다고 일러주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포디움은 왜인지 반드시 깨끗하게 존재해야할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장의사가 시체를 닦듯이 미화팀은 포디움을 닦아낸다.

그리고 잠시 뒤, 나는 빠루를 가지고 포디움을 꼼꼼히 부순다. 포디움은 산산조각난다.

 

오래 전 내 꿈은 소설가였다. 그것은 내가 품었던 거의 유일한 꿈이었다. 그 꿈이 사라지고 나서, 나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서킷에서 일을 하게 된 이후부터는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 더 시간에 쫓기던 때도, 더 열악하게 살던 시절도 있었지만 나는 그때도 어김없이 글을 썼다. 하다못해 일기라도 쓰려고 애썼다. 그러나 서킷에서 일한 뒤부터는 정확히는 포디움을 부수기 시작한 뒤부터는, 단 한 단락의 글도 완성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더이상 무엇도 꿈꾸지 않게 되었다. 대신 나는 전에 없이 명랑해져갔다. 자주 술자리를 가졌고, 웃음이 많아졌다. 반대로 혼자 있는 시간은 흐릿해져갔다.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곧 글을 쓰는 물리적인 시간만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을 화학적으로 변화시킨다. 그보다 나아가서 나는 생물학적으로, 심지어는 지구과학적으로 변해나갔다.

내 우주의 항성은 빛을 잃어버렸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행성에서, 나는 작은 전구를 켰다. 놀랍게도 전구는 포디움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포디움에 오르지 않았다. 대신 빠루로 그것을 산산조각 냈다.

 

소설가를 꿈꾸던 시절에 알고 지내던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빠루를 쥐던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자의 손은 작고 따뜻했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어?”

그것은 복잡한 문제였다. 내가 소설가를 꿈꾸던 시절, 우리는 서로 친구였고 각자 이성친구가 있었다. 그녀와 나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나 소설을 합평하는 모임을 함께했고, 때때로 술을 마셨다. 그때 내가 그녀의 소설을 읽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술을 마시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하는 것들은 대체로 잊어버렸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펜을 내려놓고 빠루를 쥐었기 때문이 아닐까한다.

 

나는 그녀를 고등학생 때부터 좋아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대학교 때 처음 알게 되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교제를 시작했다. 하지만 왜인지 나는 그녀와 고등학생 때 만났었다는 착각이 든다.

1 여름방학동안 지냈던 울진의 이모집에서 처음 만났다거나, 관객이 몇 없는 청소년 영화제의 스크린 뒤편에서 알게 된 사이, 혹은 야간자율학습이 시작되기 전 연홍빛 하늘 아래에서 그렇게 만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웠으리라고 생각한다.

너는 이과를 갈거니 문과를 갈거니, 따위의 대화를 나누고, 이과를 간다면 물리와 화학, 생물과 지구과학 이렇게 네 개의 과학탐구 과목이 있단다. 하는 정보를 공유하며 매점 햄버거를 씹는 그녀와 나. 나는 왜인지 그녀와 함께 그런 시절들을 통과해온 것만 같다.

 

어쩌면 지금의 모든 현실이 어느 노부부의 상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녀와 내가 실은 팔십 노인인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 게이트볼을 하러 다닐 정도로 정정하고, 그녀는 어르신들을 위한 노래교실엘 다닌다. 노부부는 고등학교 때 만나서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같은 대학 같은 과에서 함께 소설을 썼고, 끝내 결혼했다. 그러고는 노인복지관에 다닐 나이가 될 때까지 함께 살았다.

노부부의 상상은 손녀로부터 시작되었다. 손녀가 물었다.

할아버지는 다시 태어나도 할머니랑 결혼할거야? 할머니는? 할머니는 다시 태어나도 할아버지랑 만날 거야?”

노부부는 노인 특유의 초탈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백발이 되어버린 여자가 먼저 답했다.

네 할아버지를 다시 만날 거야. 근데 다른 남자를 못 만나본 게 억울해. 이 남자 저 남자 다 만나보고 나서, 다시 네 할아버지 만날 거야.”

그러자 게이트볼 스틱을 만지작거리며 내가 대꾸했다.

나도 이십대로 돌아가면 여자 많이 만날 거야. 여자 많은 곳을 찾아다닐 거야.” 손녀딸이 웃었다. 그러자 늙어버린 내가 덧붙여 말했다. “그래도 나는 네 할머니랑 살 거야.”

 

망상에서 깨어난다. 나는 다시, 서킷에서 일하는 노동자이다. 경주용차 헤드라이트의 무표정을 바라보며, 그들이 무엇을 부술 것인가를 염려해야만 하는 현장에 서있다. 경주용차는 언제나 빨리 달리는 것이 목표이고, 그 목표 때문에 늘 무언가를 부순다.

내 우주의 행성에도 서킷 하나가 있다. 그곳에서 나는 빨간색 페라리를 운전한다. 빨간색 페라리는 가장 빠른 길을 선택하는 대신, 아무 것도 부수지 않는 경로로 주행한다. 조금 느려도 좋고, 포디움에 오르지 못해도 좋다. 포디움은 어차피 산산조각 날 테니까. 누군가는 말한다. 슈퍼카로 저렇게 저속주행을 하다니.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부수지 않고, 아무도 아프거나 힘들게 만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나의 빨간색 페라리 조수석에는 언제나 그녀가 타있었으면 한다. 정확히 언제부터 그녀가 그곳에 앉아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찬가지로 그녀가 언제까지 그곳에 앉아있을지 또한 알기 어렵지만 언제까지나 나의 페라리는 달릴 것이다, 더는 아무 것도 부수지 않는 경로를 따라서.

 

 

 

1991년 부산 동래구 출생

소설을 쓰고 있고, 꿈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