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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든 엄지로 매만지는 얼굴_정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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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4-13 11:23 조회8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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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7.04.14 서평

멍든 엄지로 매만지는 얼굴

그 후, 나쓰메 소세키, 윤상인 옮김

정재운

 

 

남자를 만난 건,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는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한마디로 흐릿한 인상이었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골몰해보지만, 묘사에 도움이 될 만한 거리는 끝내 떠오르지 않는다. 야구점퍼가 어울리는, 청바지가 어울리는, 또 검은 뿔테 안경이 어울리는, 그저 그런 남자였다.

 

그날의 그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나와 같은 전동차 객실 문에 인접한 자리를 잡고 앉아 한 팔로 기둥을 바투 괴고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벌이를 위해 한 보습 고시학원의 국어과 선생으로 나가기 시작한 지 두 달이 채 못 됐으니, 뭇사람들로 가득한 전철 칸 안에서 내가 굳이 그만을 오래 주목해온 것도 아니었다. 난 빈자리를 찾아 앉기도 귀찮다는 듯 그가 기댄 기둥에 붙어서 슬며시 무릎에 힘을 풀었다. 그렇게 앉지도 서지도 않은 자세로 십여 코스쯤 실려 갈 예정이다. 이쯤해서 설렘과 기쁨 가득한 나의 직장생활 이야기를 짧게 하고 싶다.

 

행복한 직장생활의 제일원칙이란 무엇일까. 하늘하늘한 업무량? 끈적끈적하지 않은 인간관계? 알량함을 면치 못하는 급여의 문제 앞에 초연할 수만 있다면, 나의 일터는 그럭저럭 마음을 붙일 만한 곳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때그때의 필요 때문에 하는 벌이와 엄연한 직업인으로서 갖는 생활의 피로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열없는 얘기지만, 서른을 넘긴 후에라야 이 모든 게 처음인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난 좀체 행복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이동 중인 시간을 살뜰히 투자해 자아개발을 위한 독서를 한다든지, 흔한 가요조차 듣고 싶지 않은 무기력에 휩싸여 눈을 감은 채, 옮기어만 지고 있었다.

 

곧 내릴 역이었다. 지루함을 견디며 실눈을 떴다. 그때, 그가 쥐고 있는 휴대전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화면을 어루만지는 보라색으로 멍든 손톱이 박힌 엄지를 보고 말았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폴로 코트가 어울리는, 차분한 슬랙스가 어울리는, 신사용 로퍼가 어울리는, 그저 그런 남자였다.

 

상상 속의 그에게 난 무엇을 입힌들 잘못이 없다. 허나 성인 남자의 손바닥보다 널찍한 화면의, 삼성에서 만든 그 전화기에 관해선 꼭 그것이어야만 한다. 지금 나를 전자상가에 데려다 놓는다면 수십 수백 가지의 진열 상품 가운데 정확하게 그것을 집을 수 있다. 또한, 그 프레임 속 미소 띤 한 여인의 얼굴에 관해서도 한정 없이 그릴 수 있으리라.

 

여인의 얼굴은 첫사랑을 기억하는 모든 개인의 어떤 눈이면서, 마지막 사랑을 약속하는 어떤 입이며, 내밀한 예감을 맡는 코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러하다.

 

그는 단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만 비겁했던 것뿐이었다. 사오 일 동안 그는 손바닥에 올려놓은 주사위만 쳐다보며 지냈다. 오늘도 아직 손에 쥐고 있었다. 빨리 운명이 밖에서 찾아와서 그 손을 가볍게 쳐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손에 쥐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기도 했다.

- p. 257.

 

사랑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행복에 관한 정의를 시도하는 것처럼 쑥스러운 것이어서, 그 사랑의 얼굴을 만지려면 멍든 손톱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할 것만 같다. 그 후의 다이스케 역시 자신의 분홍빛 손톱을 내려 보며 부끄럽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자신의 오랜 벗 히라오카와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던-아이를 잃고, 궁핍한 생활고를 안고 도쿄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미치요의 등장 앞에 그가 할 수 있는 건 기껏 경제적인 원조가 다다.

 

서른이나 되어서 한량처럼 빈둥거리는 것은 아무래도 보기 좋지 않구나.”

다이스케는 결코 빈둥거리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은 직업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충실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고귀한 부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사실은 아버지가 가엾어졌다. 아버지의 단순한 두뇌로는 이렇게 의미 있는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 자신의 사상이나 정서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 곤란한 일이지요.”라고 대답했다.

- pp. 41-42.

 

생활을 위해 벌이를 해본 적 없는 그는 아비의 원조 아래에서 나름의 공부와 성찰로 사색을 이어가는 인물이다. 그가 히라오카에게 일자리를 주선해주고, 미치요에게 보이는 진정성의 기반은 이전 세대가 구축해놓은 토대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토대는 언제까지나 굳건하겠지만, 그와 대척점에 있는 남성성의 존재-아버지와 형-는 자신들의 세계로 쉬이 편입될 생각을 않는 다이스케에게 정략결혼을 통해 부양의 책임을 지우려는 등, 그가 추구하는 정신적 고양감 따위 허락지 않는다. 유예기간을 설정해두는 것이다.

 

주인공은 아비로 상징되는 전근대 일본이 구축해놓은 정신사적 가치와 서양에 의해 침윤된 근대화의 환상을 혐오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그의 품위가 유지되는 근간이기도 하다. 내가 글쓰기라는 지상의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그간 생활을 등한시 할 수 있었던 것도, 가치 폄훼해온 억척어멈의 토대에 빌붙어온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다이스케의 처지가 메이지 시대의 지식인이 직면한 딜레마의 표상이라면, 나 역시 신자유주의 시대의 파고 앞에 객체화된 개인의 한 전형일 것이다.

 

그러한 나지만,

다시, 행복에 관해서 말하고 싶다.

어쨌든 우리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행복을 등지는 선택을 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다이스케는 그간 자신을 둘러싼 사색의 기쁨, 고상한 취미를 비롯한 일체의 정신적 고양감을 포기한다. 껍데기 속에 보장된 행복을 거머쥐었던 손을 마침내 펴고, 스스로 유예기간에 종말을 고한다. 히라오카의 아내인 미치요에 대한 사랑을 선택함으로 말이다.

 

천천히 이야기하죠.”

하며 궐련에 불을 붙였다. 다이스케가 대답을 미룰수록 미치요의 안색은 점점 나빠졌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소리를 내며 그침 없이 내렸다. 두 사람은 비에 의해, 빗소리에 의해 세상에서 격리되었다. 그리고 같은 집에 살고 있는 가도노와 아주머니로부터도 격리되었다. 두 사람은 고립된 채 흰 백합의 향기 속에 갇혀 있었다.

pp. 279-280.

 

그가 영원토록 갇혀 있고 싶었던 풍경,

빗소리와 백합의 향기로 어찔하게 고립된 세계에서 부디 안녕하길.

 

대개의 모든 우연들이 그렇듯 남자를 인지했던 그날로부터 나는 그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어느 역, 그가 당도할 역의 플랫폼엔 멍든 엄지로 매만지던 얼굴의 그녀가 서 있길. 자아의 명령과 외적 사회의 무게가 정면으로 부딪히는 시간을 살라먹고 마침내 손을 펼친 모든 이들오비를 두른 유카타가 어울리는, 감청 버선과 게타가 어울리는, 그저 그런 남자. 그의 이름은 아마도……

다이스케.

허나, 김철수라 불러도 틀리지 않은.

 

 

 

- 부산민예총 사무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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