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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 장09] 끝에 앉아서는1_윤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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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420회 작성일 20-11-26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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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 장09]

끝에 앉아서는

윤이삭

 

 

  비탈길에 트럭이 매달려 있었다. 생수를 사오는 길이었다. 트럭 짐칸에 장롱이나, 책장이 비스듬하게 기울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어둑한 골목에서 한 사내가 냉장고를 업은 채로 걸어 나왔다. 그는 냉장고를 짐칸 앞에다 내려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불그스름한 이마에 굵은 핏줄이 돋아있었다. 겨드랑이에 끼워둔 생수가 차가워 손으로 옮겨 쥐다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시선이 생수로 향했다. 생수를 내밀었더니 그가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리고 받아들었다. 마개를 돌리자 꾸드득 버티는 소리가 났다.

 

  조금 가벼워진 생수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계단 끝에서 다시 오르막길이 펼쳐진다. 그 오르막길에 비스듬하게 걸친 연립주택의 2층이 자취방이었다. 철문을 열고 들어서려는데, 저 멀리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보였다. 한참 또 오르막길을 올랐다.

  매화였다. 옹벽 위로 매화가 피어있었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역광이라 사진이 시커멓게 나왔다. 다시 눈을 들어 매화를 보았다. 그러니까 옹벽 위로 올라가고자 한 것은 순전히 매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곳에 의자가 있었다. 포장마차에서 흔히 보는 파란 플라스틱 의자였다. 누군가 저곳에 올라가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그 상상만으로 나 역시 그 풍경을 눈에 담고 싶었다. 무분별한 질투 같은 것이었다.

 

  좌측 교회를 통하는 철문은 멀리서 봐도 굳게 잠겨 있었다. 분명 옹벽 위로 이어지는 입구가 있었을 텐데. 우측에 있는 초등학교로 향했다. 주말인 탓인지 경비원이 없어 곧장 운동장에 들어섰다.

  운동장에서 야산으로 가는 통로는 철망이 가로막고 있었다. 낮은 철망은 움푹 들어갔는데, 초등학생 시절 철망을 밟고 야산을 넘어간 기억이 있었다. 떼 지어 몰려다니며 솔방울을 서로 던져댔었지. 그때처럼 철망을 밟고 넘어갔다. 어째서인지 어린 시절 기억보다 넘어가는 것이 배로 힘들었다.

 

  야산을 오르자 옹벽으로 이어지는 길목이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넘지 못하도록 가시 돋친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었다. 눈앞에 길을 놔두고 완전히 가로막히니 도리어 포기가 쉬웠다. 자취방으로 돌아가 낮잠이나 청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때 울리는 휴대폰.

  ‘어디냐.’

  “우리 다녔던 초등학교인데.”

  ‘거긴 왜 갔냐.’

  무어라 대답할까. 그냥 산책이라 답해주었다.

  ‘기다려라.’

 

  초등학교 동창인 녀석이 슬리퍼를 끌고 나타났다. 10년 만에 이 동네에 돌아와 슈퍼에서 딱 마주쳤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도 꽤나 오랫동안 친했더랬다. 10년 동안 잊고 산 게 이상하리만큼. 녀석이 철조망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역시 못 넘어가겠군.”

  한참 기다렸더니 고작 한다는 소리였다. 녀석은 자신이 아는 길이 있다며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야산을 지나 운동장을 지나 교문을 지나 매화가 잔뜩 핀 옹벽마저 지나쳐 교회 앞에 섰다.

  “내가 이 교회 청년부 회장 출신이다.”

  녀석이 말했다. 처음 안 사실이었다. 녀석이 호기롭게 교회에 들어가 옹벽으로 이어지는 철문 앞에 섰다. 역시나 자물쇠로 굳게 잠겨있다. 게다가 경고문도 붙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