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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2_박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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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8-10 16:35 조회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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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7.08.10 초단편소설

사과 2

박창용

 

 

계절이 하나 늘었어. 그래, 봄여름가을겨울 말고, 다른 계절이 하나 늘었다는 말이야. 먼저 우리, 계절이라는 말을 의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레 전 새벽, 척박한 공사장에서 좀체 싹을 못 내밀던, 노르스름한 들꽃의 씨가 짙고 낮게 드리운 안개에 기운을 얻은 계절이 있었어. 나의 지금은 일흔 시간 넘도록 비가 그치지 않고 내리는 계절이야, 땅을 파고 나와서 처음 마주친 나무에 들러붙어 숨죽인 채 때를 기다리던 매미들이 비가 잠시나마 잦아들던 오늘 아침에 일제히 온몸을 떨어 구애를 했고, 덜 닫힌 창문의 좁은 틈새로 비가 조금씩 꾸준히 들치는 바람에 누군가의 습작품이거나 필사본이었던 낡은 원고지들이 몇 장인지 알 수 없게 서로 들러붙었더군. 너는 지금, 과연 어떤 계절에 있다고 생각할는지. 나는, 아마도 우리는, 버림받은 마을의 골목 어귀에서 꼬리가 뭉툭한 고양이들이 따뜻한 잠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털 뭉치가 흩날리리만치 치열하게 다투는 와중에, 갑자기 수은등이 툭 꺼지는, 안온한 계절을 곧 겪게 될 거야. 겪었던, 겪고 있는, 겪을 계절 어디에도 봄이나 여름, 가을, 겨울은 없지. 그래, 이건 죄다 하나의 질문이야. 과연 계절이 봄여름가을겨울, 이렇게 넷이었을까? 이제 하나가 늘었으니 다섯이 된 것일까? 물론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다만 계절이 넷이 아니었다면, 계절을 넷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모든 시간에 각각의 계절을 부여했다면, 우리는 아직도 뭔가를 줍거나 따거나 비교적 손쉽게 잡을 수 있는 짐승이 많은 곳을 찾아 이 드넓은 땅들을 배회하고 있을 테지. 우리가 뭐든 나눠서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데에는, 그러니까 분절과 정의와 판단을 사랑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셈이랄까. 우리가 어찌됐든 넷밖에 없는 계절에서 하나가 더 늘었다는 사실을 자축할 법한 것이, 이제 우리의 일상은 아주 미세하게나마, 덜 지루하고, 덜 난폭하고, 덜 지독하게 되었기 때문이야. 새로운 계절은 말이야, 우리를 좋은 감각으로 이끄는 힘을 가졌지. 부패를 코앞에 둔 것들- 이를테면 홍어, 과일주, 사랑, 열정, 호의, 시상, 영감 등-이 성숙 혹은 숙성의 단계를 유지하게끔 만드는 날씨를 지녔어. 그 날씨 아래, 숙성과 부패의 기로에서 그 가치가 손쉽게 좌우되는 것들은 숙성이 가닿을 수 있는 끄트머리, 그 정점으로써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지. 우리는 새로운 계절이 지배하는 하루를 그려볼 수도 있어. 새로운 계절에 뜨는 해는 주로 붉지만 노랑과 초록을 넘나들어. 그래, 이파리의 색깔 초록, 산이나 들도 하늘에 초록이 스며있다는 말이야. 새로운 계절에서는 누군가가 머물거나 지나친 공간에 남긴 숨결이나 안도, 독백처럼 비교적 타인이 알아차리기 어렵고 차분한 심신의 상태들이, 주로 향기의 방식으로 흔적이 되어 잘 남아 있어. 특히 푸르스름한 해가 뜬 날이면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대부분의 공간은 이미 타인이 머물거나 지나쳤으므로, 달착지근하면서도 새콤한 냄새가 코를 잠시도 내버려두지 않지. 그러한 냄새들 때문에 입 안이 침으로 촉촉하게 적셔진 상태로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면, 나의 흔적 또한 달고 신 향기로 이 공간의 다음 누군가에게 남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진심으로 깊숙하고 기쁘게 숨을 쉬거나 천천히 낮게 한참을 읊조리게 마련이야. 특히 초록이 밝고 또 밝아 연두 빛 해가 떠있는 날에는, 잠을 자거나 간단한 식사를 가지는 시간을 빼고 굼뜨게 걷거나 거의 얹혀있다시피 의자에 앉아서 느린 숨을 쉬며 입술을 옴찔대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지, 물론 기꺼운 마음으로. 새로운 계절의 밤은 다른 계절과 다를 게 없어. 단단하게 맺힌 마음들이 조그마한 씨앗 모양으로 어둠 곳곳에 도사리고 있을 뿐이야. 붉거나 노랗거나 초록의 해가 지면서 내려앉는 땅거미를 따라 씨앗들은 제자리를 찾아. 그것은 알록달록한 코끼리 천을 침대보로 삼은 어린 조카의 요람 속 작은 베개 옆에 놓여있기도 하고, 버려진 채 도장이 벗겨져 군데군데 녹이 슨 일 톤짜리 흰색 트럭 적재함에 한가득 실려 있기도 하고, 풍년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을 만큼 번성 중인 어린 배추의 밭에서도 이따금씩 놓여있기도 하지. 막무가내로 널려있는, 게다가 검어서 밤이면 잘 보이지 않는 씨앗에 걸려서 넘어지거나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그것들은 단지 보일 뿐이지 우리의 몸으로는 만질 수 없거든. 새로운 계절이 아닌 다른 계절에는 그저 볼 수 없었던, 씨앗일 뿐이야. 어찌됐든 새로운 계절은 우리에게 새로움을 선사할 것이므로, 게다가 이왕이면 덜 지루하고, 덜 난폭하고, 덜 지독한 계절을 반갑게 맞이할 준비가 필요해. 일단 우리, 지금부터 이 계절을 사과라고 부르도록 하자구.

 

 

 

인류가 활자를 이용하여 자행해온 모든 시도와 모험을 답습하려는 목동 지망생서울에서 개인으로 생존해내기 위해 안전하면서도 전위적인 음주 행각을 연구하여 실천하고자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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