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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_김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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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2,100회 작성일 17-08-0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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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7.08.03 칼럼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김준영

 

 

오랜만에 재혁(가명)에게서 연락이 왔다. “선생님! 이번에 국가장학금이랑 성적장학금이 나왔어요!”, “제가 쏠테니까 한번 봐요.” 그는 내가 학교 밖 청소년지원센터(꿈드림센터)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제자였다. 학교 밖 청소년지원센터는 학교를 그만둔 청소년들 혹은 자퇴를 결심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상담과 검정고시 시험 및 다양한 청소년 활동을 지원하는 센터다. 그곳에서 1년간 근무하면서 수많은 청소년들과 상담하고 프로그램을 진행했지만 아직도 연락이 오는 녀석은 재혁이와 그 또래의 태현(가명) 정도였다.

 

재혁의 첫 인상은 아주 강렬했다. 스무살 또래들에 비해 키는 작지만 하얗고 수려한 이목구비를 가진 녀석은 제법 모성애를 자극하는 그런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헌데 녀석은 세상 다 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항상 피곤한 얼굴로 상담을 하고 알바 시간에 쫒기는 모습이 늘 마음에 걸렸다. 재혁의 집은 서울에서 작은 사업을 했다. 소위 말하는 갑부는 아니지만 넉넉한 가정형편에 어릴 적부터 피아노, 기타, 보컬트레이닝 등 각종 예술수업도 받았고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 연예기획사에 보컬 연습생이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재혁이 중학교 2학년 무렵, 아버지의 사업이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했다. 재혁의 가족들은 하루아침에 서울의 중산층에서 부산으로 야반도주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사춘기 시절의 경제파탄은 재혁을 반항아로 만들기 충분한 계기가 되었고, 아버지는 실의에 빠져 알콜중독으로 정신병원을 들락날락 하기 시작했다. 불행은 겹치고 겹쳐 어느 날 어머니가 쓰러지셨고 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상담 중에 아직도 뚜렷이 기억나는 재혁의 모습 중 하나는 어머니의 마지막을 회상할 때였다. 녀석은 그날도 학교는 가는 둥 마는 둥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있었고 어머니는 병실에서 숨을 거두셨다고 했다. 뒤늦게 이모의 연락을 받고 병원에 갔을 때, 숨을 거둔 어머니를 도저히 쳐다 볼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훔쳤다. 재혁은 그날 이후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학교를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몸을 망가뜨렸다. 자연스레 학교는 퇴학처리가 되었고, 정신차려보니 재혁은 알콜중독 아버지와 어린 남동생을 부양해야하는 가장이 되어 있었다. 오전, 오후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나이트 삐끼도 했더랬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고, 가장의 무게와 어린동생을 돌보느라 재혁은 지쳐갔다.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었고, 결국 자살을 선택해서 손목을 그었다. 다행히 생명에 지장은 없었지만, 재혁은 그날 이후로 삶의 모든 것이 무미건조하고 재미가 없다고 하였다. 그런 재혁의 목숨을 살리고 돌봐 준 것은 재혁이 퇴학을 하던 당시의 청소년상담사 선생님이셨다. 그렇게 재혁은 스무살이 되었다. 그의 삶은 여전히 고달팠다. 경제적인 능력을 잃어버린 아버지와 중학생 동생을 돌보고, 월세가 밀려 쫓겨나서 집을 다시 구하고,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가고 있었다.

 

그를 소개시켜준 것은 당시의 청소년상담사 선생님이었다. 녀석과 상담을 하고 스스로 무엇이 되고 싶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혁은 대학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검정고시를 통해서라도 고졸은 해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대학 등록금의 무거운 멍에와 졸업 후에도 취업준비를 해야만 하는 모든 것들이 덜컥 두려웠을 것이다. 학업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녀석은 오전에 하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오후에 고깃집 아르바이트만 하기로 했다. 오전에는 꿈드림센터에서 멘토링 수업을 받고 부랴부랴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명하다. 재혁은 다행히 성실하고 우수한 학생이었고, 우리는 그런 재혁의 시험을 위해 학원비를 지원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고 검정고시 시험일이 다가왔고 95점의 높은 성적으로 고졸자격을 획득했다. 시험결과가 나오는 날, 함께 시험을 쳤던 태현과 셋이서 치킨과 맥주를 먹었다. 태현은 터무니없는 성적으로 낙방했고 위로차 만난 자리에서 나는 재혁에게 이야기했다. “대학 가자.” “재혁아, 대학가서 장학금 받고 다니면 등록금 걱정 안 해도 된다.” 하지만 녀석은 회의적이었다. “, 제가 대학을 가도 군대도 가야하고 취업을 빨리 못하면 우리 가족 굶어 죽어요.” 재혁의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재혁의 근심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부산에 있는 모든 대학교에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아직 수시 및 정시 모집 전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자료가 필요했다. 재혁의 검정고시 성적은 좋은 편이었지만, 수능을 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수능 성적 없이 검정고시로만 갈 수 있는 대학은 제한적이었다. 그리고 취업에 대한 문제도 함께 고려해야 했다. 지금도 미안한 부분이 한 가지 있다면 그의 재능과 흥미를 고려하여 학과와 전공을 선택했어야 했지만, 재혁의 삶에 따라오는 육중한 무게에서 그런 여유를 줄 수 가 없었다. 수많은 회의와 상담 끝에 대학리스트와 전공을 결정했다. 부산의 G대학 물리치료과와 치기공과, 김해의 I 대학의 임상병리과를 추려냈다. 작년의 수시결과와 정시 성적의 커트라인을 분석하고 졸업 후 자격증만 획득하면 상대적으로 취업하기 수월한 전공이었다.

 

마침 G대학이 꿈드림센터 근처라 재혁과 태현을 데리고 입시원서를 제출하러갔다. 사실 그 날의 떨림은 오히려 재혁이 녀석보다 내가 더 떨렸으리라. 재혁이 서류를 제출하러 간 사이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물었다. 참으로 내 자식이 대학원서를 제출하러 갈 때의 느낌이랑 지금이 비슷할까? 라는 문답을 하는 사이 옆에서 눈치 없는 태현이 아 대학교는 화장실 냄새도 좋은 것 같아요.” 참으로 어이없어 웃었지만 괜시리 속상한 마음에 태현의 뒤통수를 갈기며 너도 공부 조금만 열심히 하지 그랬노?”라며 말했다.

 

재혁은 사회배려전형으로 G대학 물리치료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물론 나 혼자 녀석을 돌보고 이룬 공은 절대 아니다. 재혁의 공부를 도와주신 멘토링 선생님들과 상담센터직원 분들까지 수많은 지원을 통해 우리는 힘들지만 올바른 청소년을 배출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학교애서 캠퍼스 커플로 연애도 하고 근로장학생으로 도서관에서 일하느라 전화하면 바쁘다고 전화 끊기 일쑤지만 가끔 일상에 찌들어 잊을 때쯤 되면 술 한 잔 하자며 불러내는 녀석이 고맙다. 오랜만에 만난 저녁, 물리치료 공부가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며 사람의 뼈 개수가 몇 개인지 압니까? 내가 쌤 때문에 206개의 뼈 이름을 다 외우고 있어요!”라며 투덜투덜 거리다가도 공부하다가 힘들면 내 생각이 많이 난다며 닭살 돋는 이야기를 하는 녀석을 보면서 대견하기도 하고 괜히 가슴이 뭉클해졌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을 한 번씩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사실 요즘 청소년들은 난해하고 괴팍하여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면 훨씬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청소년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재혁은 학교 밖 청소년 지원센터에서도 아주 우수한 사례로 상도 수여받았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재혁이 살고 있으며 그 중 대부분은 아직도 많이 방황하고 있다. 조금만 따스한 관심과 애정으로 사회 전체가 그들을 보듬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친다.

 

 

 

- 34세, 6년차 청소년지도사, 양산시청소년문화의집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