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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 넘기는 소리04] 거인_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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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353회 작성일 20-08-13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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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 넘기는 소리04]

거인
지하

 

 

거인

 

  지난 시간엔 플라톤을 만났다. 플라톤을 생각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다. 오늘 다뤄 볼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더불어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다. 형이상학, 논리학, 정치철학, 윤리학, 자연철학, 과학, 생물학 등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 통달하고 그것들의 기초를 마련한 철학사의 거인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플라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것은 스승을 극복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설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학()과 문()의 토대를 정립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플라톤의 저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비교해서 읽어보라. 플라톤의 저서는 이야기로 되어있어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이 인간의 글은 정말 한 치의 거짓말도 보태지 않고 말하자면 토 나온다. 언제든 시험 삼아 한번 읽어보시라. 학문을 하려면 못해도 이렇게는 해야 된다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부동의 원동자, 형상-질료, 4원인론 - 아리스토텔레스( B.C. 384 ~ B.C. 322 )

 

  세상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 그렇다면 존재하는 것은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를 차례로 원인, 원인의 원인, 원인의 원인의 원인을 따라 무한히 소급해가다보면 결국 마지막에 최종 원인이 존재할 것이라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마지막 원인이기에 자기 존재의 원인을 가지지 않는 완벽한 궁극적 존재일 것이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라 불렀다.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자라는 뜻이다. 이는 세계의 다양함을 설명할 수 있게 만든다. 다양함이 어떤 하나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만약 그 하나가 부동(不動)이 아니라면 변화와 운동을 한다는 뜻이고, 변하고 운동한다는 것은 또 다르게 변할 것이니 매번 우리가 인식할 때마다 변함을 뜻한다. 이는 곧 불완전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최종 원인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이게 만드는 자이어야만 한다.

 

  데모크리토스는 물질이 스스로 형태와 조화를 이룬다고 본 반면, 플라톤은 사물의 형성에는 질료를 벗어난 원리(이데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스승 플라톤을 따라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물질이 스스로 조화를 이룬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이데아라는 초월적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물 너머에 있는 이데아를 상정했던 플라톤과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 형성의 원리가 이미 사물 안에 들어 있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모든 사물은 그 자체 안에 형상(eidos)질료(hyle)를 결합하고 있다.(여기서 말하는 형상은 플라톤의 형상과 다르다! 이는 철학자들마다 하나의 개념을 저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형상의 존재는 중요하다. 형상이 존재하기에 이 세계는 단순한 물질의 흐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정한 동일성들이 존재하게 된다. 형상이 없다면 무정형의 덩어리만이 존재할 것이다. 플라톤에게서의 이데아가 그러하듯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의 형상은 무정형의 덩어리에 개체성과 조직의 원리를 부여하는 근본원리이다.

 

  여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은 4원인론이 근저에 놓여있다.

  -첫째, 질료인(質料因)으로서 만물을 구성하는 내재적 질료를 의미한다.(그것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가? - 책상은 나무로 되어있기 때문에 책상인 것이다.)

  -둘째, 형상인(形相因)으로서 질료인에 새겨진 계획, 모양, 의지를 지닌다는 만물의 형성 원리이다.(그것은 어떠한 형태를 띠고 있는가? - 책상은 책상의 형상을 띠고 있기 때문에 책상인 것이다.)

  -셋째, 작용인(作用因)으로서 변화의 원리이다.(무엇이 그것을 만들었는가? - 책상은 어떤 목수가 이 책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넷째, 목적인(目的因)으로 모든 운동의 궁극적인 목표이다.(그것은 무엇을 위해 있는가? - 책상은 책을 놓기 위해 있는 것이다.)

모든 있는 것들은 크기가 크든 작든 신(부동의 원동자)을 의식하기에 신에 대한 염원과 사랑으로 활동하며 신을 향해 움직인다. 다시 말해 모든 것들의 궁극적 목적은 신과의 합일이며 자연물의 존재와 변화는 신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다.

 

 

상승, 하강

 

  있는 것 너머를 보려 했던 플라톤과 비교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있는 것 자체에 대한 탐구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 했다. 플라톤의 말처럼 하늘 너머엔 이데아가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이데아라는 가설 없이 개개의 사물을 유()와 종()으로 분류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