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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 장04] 달리기를 권합니다_윤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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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407회 작성일 20-08-13 0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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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 장04]

달리기를 권합니다 

윤이삭

 

 

자신이 누구인지 궁금하다면 달려보면 안다. 같이 달리기로 한 이들은 초장부터 멀리 사라진지 오래였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면서 어라, 무엇인가 잘못 되었음을 느꼈다. 페이스를 올려 봐도 가까워질 낌새는 보이지 않고 숨이 차올랐다. 새해가 갓 지난 찬 겨울 공기가 폐를 찔렀다. 통증이 폐가 그곳에 있음을 알려주었다. 폐야, 너는 거기 있었구나.

 

같은 동네서 20년 동안 함께 지낸 동창들이 달리기를 제안했다. 며칠 전부터 메신저에다 각종 달리기 용품을 보내왔다. 사진으로 본 러닝화, 바람막이 점퍼, 팔에 휴대폰을 거치하는 밴드, 짧은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있었다. 둘은 하나같은 차림으로 도심을 가로지르는 하천에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두터운 패딩을 입은 나는 냇가에 비친 그들의 맨다리가 안쓰러워보였다.

 

패딩을 입은 내가 되레 안쓰럽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땀을 머금은 패딩이 족쇄처럼 느껴지면서 나는 걷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들이 옷차림에 대해 언질을 주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웠다.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한 것일까. 며칠 전부터 계획한 함정에 보기 좋게 걸려든 것일까. 사진을 보내온 것은 이야기를 극적으로 만들 복선이 아니었을까. 망상이 꼬리를 물었다.

 

며칠 전 졸업 논문을 완성했다. 강을 따라 걷는 인물들이 온갖 망상을 해대는 세 편의 이야기를 갖고서였다. 강은 인물들에게 기기묘묘한 사건들을 겪게 하면서 혼란에 빠뜨린다. 문득 인물들이 원치 않은 사건에 휘말린 까닭이 강가를 유유자적 걸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느긋한 발걸음은 먹잇감이 되기 십상이다.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예정한 반환점인 지하철역에서 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겉옷을 벗은 반팔 차림이었다. 그들은 스트레칭을 하며 제자리 뛰기를 했다. 달궈진 입김이 나란히 두 줄기로 피어올랐다. 내가 허리를 굽히고 기침을 토하자 그들은 헛둘헛둘하며 다시 출발했다. 헛구역질이 났다. 발걸음을 재촉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자 뛰어온 거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어째서 달리지 않고서는 달릴 수 없는 것일까.

 

달리다가, 걷기를 반복했다. 걸으면 온갖 풍경이 시끄럽게 부닥쳐왔다. 밤하늘에 알알이 박힌 별과 하천이 내뿜는 찬바람과 도심에서 피어나는 매캐한 연기, 그리고 웬 새가 있었다. 500원 동전에서 볼 법한 부리가 긴 새였다. 바로 건너편 도로에 승용차가 내달리는 도심에서 상당히 어색한 조우였다. 쭈뼛쭈뼛 패딩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는데 갑자기 화면이 새카매졌다. 휴대폰은 찬바람을 맞으면 부쩍 방전이 되기 일쑤였다. 새는 커다란 날개를 펼쳐들고 저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이제는 내가 정말 달리고 있는 게 맞는지 몽롱했다. 그저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무엇인가가 있을 뿐이었다. 팔다리가 여전히 제자리에 붙어 있는 지도 몰랐다. 지난 나날, 쉼 없이 굴러온 팔다리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앞으로의 생존에도 꼭 필요할 팔다리가 무사했으면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숨 쉬는 법을 잊지 않기 위해 집중해야만 했다. 자칫 방심하다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휴대폰이 꺼져 도착 지점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미 도착한 그들이 나를 기다리다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몰랐다. 시간이 한참 지난 것 같기도, 잠깐인 것 같기도 했다. 밤하늘 천장이 유독 멀게 느껴졌다.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동시에 한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정해진 길을 따라 몸을 뒤척인 걸까. 어지러웠는데, 마치 신기루처럼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는 그들이 보였다. 거짓말처럼 또 반대방향으로 달리는 것은 아니겠지. 걱정하던 차에 그들이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완주- 완주- 하고 소리쳤다.

 

그럼에도 동네로 돌아가는 오르막길이 남아있었다. 반팔을 입은 친구가 평평한 지대의 장점에 대해 한참 떠들었다. 달리기에 얼마나 편하냐며, 말하면서도 한발을 질질 끌고 있었다. 다리를 계속 끌면서 팔에 붙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친구는 가는 거리만 생각했지, 오는 거리를 계산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오간 거리는 모두 20km였다. 하프 마라톤이군. 입을 다물고 있던 다른 친구가 말했다. 두 번 다시 달리자고 하지 마라. 20년 동안 꾸준히 낡아가는 동네 초입에서 우리는 낮게 웃었다. 농담마저 잃는다면 그땐 정말 끝장이다. 달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