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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생의 독서일기04] 심농, 매그레, 맥주와 함께_김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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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455회 작성일 20-08-0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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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생의 독서일기04]

심농, 매그레, 맥주와 함께

- 조르주 심농, 매그레 시리즈 몇 편을 읽고 

김재홍

 

 

휴가가 한창이다. 올해 초부터 번지기 시작한 전염병 여파로 휴가를 보내는 방식에의 변화가 불가피해 보이기도 한다. 해외여행을 계획했던 사람들은 국내 여기저기를 알아봐야 했겠고, 국내마저도 여의치 않다고 여긴 사람들은 집 안에서의 즐길 거리를 모색해야 했으리라. 산으로 들로 나가 돌아다니는데 그다지 열의가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이번 휴가철이 크게 아쉬울 것도 없었지만, 성향이 반대인 이들은 재밋거리를 찾느라 꽤나 애를 먹었을 상황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럴 때, 덥고 습한 방 안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으며 사색에 잠겨 시간을 보내는 것은, 평소 독서를 즐기는 사람에게라도 그다지 추천할 만한 것은 못 된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에어컨이 없는 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나는 결국 날씨에 지쳐 시원한 곳을 찾아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적당히 시원한 집 안에서 휴가를 보내려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드라마 몰아보기에 지쳐서, 혹은 수천 편의 영화 중 무얼 볼지 고르는데 에너지를 쏟아붓느라 그만 질려버렸다면, 거기에 더해 좀 더 차분하고 정적이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막 생겨갈 참이라면, 책 읽기는 시간을 보낼 새로운 방법으로 다가올 것이다. 최근, 우연히 집어 들어 푹 빠져버린 작가가 있는데, 작금의 상황처럼 집 안을 부유하다 지친 이들에게 어울리는 독서 경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조르주 심농(Georges Simenon, 1903-1989)이라는 벨기에 출신 작가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매그레, 그가 창조해낸 지난 세기 유럽에서 사랑받았던 탐정소설의 주인공을 일컫는다. 장편 소설로만 75권에 달하는 매그레 시리즈를 써낸 심농은, 그 자신이 만들어낸 이 매그레라는 인물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그의 소설은 수십 편의 영화로 만들어졌고, 매그레 캐릭터를 쟁쟁한 배우들이 도맡아 연기하는 등, 심농의 매그레 시리즈는 흥행 보증수표와 다름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그의 작품은 단순히 대중적인 인기만 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작가들발터 베냐민, 존 르 카레, 앙드레 지드,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윌리엄 포크너, 어니스트 헤밍웨이, 알베르 카뮈 등등에게 찬사를 이끌어내며, 문학 장에서의 그의 입지 또한 실로 대단했다. 심농의 매그레 시리즈를 우리나라에 번역한 한 역자에 따르면, 프랑스어를 사용한 작가들 중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번역된 작가의 세 번째 순위에 조르주 심농이 올랐으며, 그의 소설은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 5억 권 이상 판매되었다고 한다(조르주 심농, 갈레 씨, 홀로 죽다 외,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2016, p. 753-754. 참고.). 그만큼 유럽 전역을 넘어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했던 작가라는 말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 가장 놀라웠던 점은 심농이 다작을 한 것과 더불어 그가 한 편의 소설을 쓰는 데 몰두한 시간과 에너지였다. 그는 평생 매그레 시리즈뿐만 아니라 장편과 단편을 통틀어 400여 편에 달하는 소설을 써냈다고 전해진다. 191916세의 나이로 일간지에 입사해 기사를 써내던 시절을 시작으로 글을 써나갔던 그는 18세인 1921년 첫 소설을 출간하고, 26세이던 1929년 처음으로 매그레라는 인물을 구상한다. 그 뒤로 197269세의 나이에 돌연히 소설 쓰기를 중단하기까지, 50여 년의 시간 동안 소설만 400여 편을 쓴 것이다. 평균적으로 1년에 약 8편의 소설을 완성시켰다는 것인데, 더욱이 놀라운 것은 어떤 해, 가령 195047세이던 때에는 스물여섯 편에 달하는 소설을 써냈다고도 한다. 거기에 더해 내가 처음 집어 든 그의 장편 매그레와 벤치의 사나이같은 경우, 심농이 1952년 미국 코네티컷주에 거주할 당시에 쓰인 작품인데, 이 소설의 집필 기간은 단 9일이었다고 한다. 단편도 아닌 장편을 쓰는 데 9일이 걸렸다니, 이는 엄청난 몰입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리라. 이쯤 되니, 단순히 부러움을 넘어 그의 창작 동력은 무엇이었을지, 무엇이 그를 소설 쓰기에 그토록 몰입하게 만들었을지 나름의 궁금증이 생겨나기도 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실로 놀라운 집필력임에는 틀림없다.

 

오랜 세월 심농과 함께 하며 끊임없는 사랑을 받아온 매그레라는 주인공은 어떤 인물일까. 파리 경찰청 수사 반장인 매그레는 큰 덩치에 과묵하고, 중절모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채 그에게 주어진 사건을 직관적으로 응시하며 실마리를 차분히 풀어나가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그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우울한 정조의 파리 거리에서, 또는 운하나 항구 근처 소시민들 사이에서, 특급 호텔 지하실의 분주함 속에서 그 특유의 과묵하고 속을 알 수 없는 행동으로 소설 전반의 분위기를 주도해나가며 마지막까지 자제심을 잃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거의 모든 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렇지만 특히나, 매그레는 작가 자신의 분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매그레 시리즈에서 돋보이는 것은 주인공 매그레의 캐릭터성 만큼이나 서서히 밝혀지는 사건의 진실과 더불어 선명해지는 범인,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심농의 목적은 사건의 단순한 진실과 그것을 이루는 사실들이 명료하게 밝혀지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건 안으로 뛰어들게 되는 가련하고 나약한 인간을 서서히 비추며, 그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심농은 소설 속에서 범인을 쉽게 정죄하지 않으며 범인과 그 주변을 이루는 연결고리들을 매그레의 눈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언뜻 드러나는 그들의 행위와 고백, 표정 등을 통해 그들이 어떤 인간이고 어떻게 되어 왔는지 짐작해보도록 만든다. 그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물들을 직관적으로 응시하며, 그들에 대한 씁쓸하고 절망적이면서도 따스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는 단지 범죄를 수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건을 통해 인간을 들여다보며 거기에서 무언가를 발견해내고야 마는 것이다.

 

헤밍웨이는 아프리카 우림에서 비 때문에 꼼짝 못 하게 되었을 경우, 심농의 책을 읽으라고 강권한다. 그럼 비가 얼마나 오든 버틸 수 있을 거라고. 그만큼 심농의 소설에는 독자를 푹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이번 휴가 때는 적당히 서늘한 집 안에서 시원한 맥주 한 잔매그레는 종종 소담한 카페에서 맥주 한 잔을 시켜 놓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소설 속에 등장하곤 한다을 앞에 두고 심농의 소설을 읽으며 그가 펼치는 이야기의 깊고 진한 매력 속에 한번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 참고로, 매그레 시리즈는 어떤 편을 읽더라도 맥락을 이해하기에 전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조르주 심농, 갈레 씨, 홀로 죽다 외,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2016.

조르주 심농, 매그레와 벤치의 사나이, 최애리 옮김, 열린책들, 2017.

조르주 심농, 마제스틱 호텔의 지하, 임호경 옮김, 열린책들, 2017.

조르주 심농, 안개의 항구, 최애리 옮김, 열린책들, 2011.

조르주 심농,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 이상해 옮김, 열린책들, 2011.

조르주 심농, 생폴리앵에 지다, 최애리 옮김, 열린책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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