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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밥, 너머_김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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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542회 작성일 20-08-03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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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밥, 너머

 

김석화

 

 

 

며칠 전 친구가 근무 마치고 책방에 오겠다는 전갈을 보내왔을 때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그녀는 혼자 먹는 밥에, 나는 밥을 차려야 하는 고단함에 놓여 있었고 그것을 서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 간단한 약속은 어떤 대단한 만찬에 초대된 것처럼 우리를 기쁘게 했다. 

 

쉽고 흔한 약속 같지만 집이 아닌 곳에서 저녁 한 끼 먹는 것이 그녀와 나의 생활에선 쉽지 않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녀의 매일과 ‘식’생활이 어떠한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혼자인 집, 혼자 먹는 밥, 혼자 쓰는 글. 적막. 이것을 외면하기 위해 매일 약속을 잡을 수도 없을 터. 제발 혼자 있고 싶다는 나와는 아마도 정반대이지 않을까. 집에는 돌도 씹어 먹는다는 청소년이 둘 있다. 코로나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져 책방 일 하는 동안 아이들 밥을 걱정한다. 없어서 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데 차려 먹어야 하는 밥을 말이다.(바쁜 날은 냉장고가 텅 비기도 하지만) 챙겨 먹기를 바라고, 그 나이면 알아서 먹어야지 하는 마음이 크지만 생활에 적용하기는 좀 애매하다.(나의 페미니즘 공부와 실은 매일 부딪치는 부분이다) 그래서 아침은 차려 주고 저녁은 같이 먹으려 애쓴다. 오늘 같은 날은 예외로, 아이들에게 먼저 일종의 허락을 구하는 문자를 보낸다. 엄마 조금 늦어요.

 

가방을 메고 짐을 나누어 든 손에 우산까지 펼치고선 같이 가고 싶었던 어느 국밥집으로 걸었다.(또 국밥집이다) 평상처럼 내어 만든 마루에, 따뜻한 국밥을 앞에 두고 앉으니 그저 좋았다. 거기다 제주 생 막걸리라니. 국밥까지 들이치지 않는 보슬비라니. 이 정도면 여행지의 저녁이 아닌가. 그 날의 습기가 싫지 않았고 그 골목의 왁자함이 싫지 않았다. 실로 금요일 밤을 실감케 했다.(불금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불금에 잠시 끼고 보니 나도 왁자해지고 싶었나보다. 평소에 하지 않았던 어떤 ‘이야기’를 친구에게 문득 하고 있었다. 찐득하게 뭉쳐진 이야기가 밥알처럼 국밥에 풀어졌다.

 

어떤 밥은 그렇게 이야기를 끌고 온다.

 

말이 많지 않은 우리가 평소보다 많은 말을 한 듯하다. 한 시간 남짓. 무언가 마음을 두드렸다. 톡톡톡. 국밥집 가득한 뚝배기들이 사람처럼 옹송옹송 놓여 있다. 편안하고 따뜻하고 서늘했다. 굽이치는 강물처럼 이야기가 이리저리 흘렀다. 그녀는 혼자 밥 먹을 때 휴대폰으로 넷플릭스 드라마를 한 편 본다고 했다. 나도 밥 먹을 때만 뉴스를 틀고 다 먹으면 끝나지도 않은 뉴스를 꺼버리곤 한다. 아이들과 마주하고 먹기는 하지만 대화는 최소이니까. 밥심과 분위기로 뭔가 찐한 대화를 시도했다가 큰일 날 뻔.(사춘기 청소년과 소통하기란 그들의 언어와 몸짓을 해독해도 불가능할 때가 많다) 이야기가 비어버린 식탁을 무엇으로 메꾸나.

 

밥 먹을 때 밥만 마주한다는 건 슬픈 일인가. 오늘도 밥을 혼자 먹을 누군가를 생각하면, 모임으로 늦는 날 혼자 먹을 아이를 생각하면, 그런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 문화가 되어버린 혼밥은 어쩌나. 그것이 생활이 되어 익숙해진 사람은. 밥 구하는 것마저 어려운 사람들은 또 어쩌나. 밥은 필연적으로 사람을 필요로 하나. 해도 해도 먹어도 먹어도 밥에 대한 나의 걱정과 슬픔은 놓아지지 않는다. 밥 앞에서는 늘 ‘엄마’가 앞서버리고 매일의 숙제가 되고 만다. 친구와 마주 앉아 먹는 이런 저녁은 잠시 샛길이다. 이런 밥은 목구멍에 걸리지도 않고 달게 삼켜진다.

 

부산으로 이사와 친구가 딱히 없던 나는 약속이란 게 없었다. 혼자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 밥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와야 했던 긴 시간. 아파트 상가에 우후죽순 모여 앉아 밥과 술을 나누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고 부러웠다. 시끄럽기 그지없는 사람들이 근사한 어떤 장면처럼 보이곤 했다. 슬그머니 끼어 앉아 있고 싶었다. 시끄럽게, 다정하게, 노동 없이 먹는 밥이 가끔 필요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차려내야 한다는 것이 늘, 조금은 슬펐다. 다정 대신 노동만 남았으므로. 아이들이 커갈수록 식탁에서 말은 점점 사라지고, 밥과 묵묵부답만 자리를 지켰다. 

 

제삿밥 먹는 유령이 되어갈 즈음, 책방에서 동무들을 만났다.

 

차곡차곡 쌓인 관계들이 천천히 연결되어 느슨한 고리가 되었다.

 

그들과 동무가 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빈 밥’을 함께 먹어서가 아닐까. 한 끼를 같이 먹는 것은 서로의 사정을 잘 살펴야 가능한 일이니까. 밥이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 끼도 다정하게, 감사히 먹을 수 있으니까. 동무들은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렇게 가끔 밥을 나누며 서로의 빈 밥 곁에 있어주려 했다. 함께였다가, 둘이였다가, 셋이었다가. 

 

빵, 김밥, 돈까스, 치킨, 국밥......

 

책방 근처에서 이런 밥 주위를 돌고 돈다. 

 

책 몇 권 판 날은 회식하자고 큰 소리 뻥뻥 친다. 내가 살 수 있는 밥은 허름하다. 그러나 그 허름한 밥을 함께 나누고 싶다. 서로의 저녁이 가끔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위로와 위안은 불가능하다 생각했는데, 밥 한 끼가 그것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책방에서건 집에서건 밥을 먹는 사람 옆에, 아이 옆에 있어주기로 한다.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나의 자리에서 건넬 수 있는 언어라 여긴다.

 

밥을 함께 먹는 것, 혹은 밥을 챙기는 것이 내게는 슬픈 일이면서 가장 소중한 일이 되었다.

 

그 사람을 잊지 않았다는 신호.

 

네 곁에 있겠다는 보이지 않는 구호. 

 

밥알처럼 찰진 애정.

 

그 날 국밥을 먹고 헤어진 후 친구가 문자를 보내왔다. 혼자 집에 가는 길이 오늘은 좋다고.

다정한 밥이 서로에게 이로웠던 날. 밥 먹는 것이 전투 같은 시대에 우리는 또 다시 국밥 먹을 일을 도모중이다. 함께 밥 먹을 이유는 많으니까. 

 

기말 시험 중인 아이를 위해 오늘은 전복을 넣고 닭을 삶았다. 한 번은 밥을 말아서, 또 한 번은 소면을 넣어서 먹여야지. 그 곁에 말없이 있어줘야지. 

 

어떤 ‘외출’과 같은 한 끼가 다시 올 것이다. 그런 드문 날들이 가끔 우리에게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