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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 넘기는 소리03] 또, 또 파르메니데스?_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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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7-23 09:53 조회5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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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 넘기는 소리03]

또, 또 파르메니데스?

지하

 

 

, 또 파르메니데스?

 

  혹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들어보셨는가? 철학자 화이트헤드의 말에 필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플라톤을 이해하지 않고선 서양 철학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플라톤이라는 인물이 허공에서 뿅!하고 갑툭튀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플라톤은 어떤 거인의 어깨 위에 서있는가?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 선생?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가 밟고 올라서야할 벽이 있다. 우리가 다뤘던 인물 중에 떠오르는 사람 하나 있지 않은가? 그렇다. 또 파르메니데스다! 왜 또 파르메니데스인가? 지겹지만 한 번 더 파르메니데스를 극복해보자. 참는 자에게 복이 있을 지어니

 

 

이데아, 그리고 하나와 여럿의 문제 플라톤( B.C. 427 ~ B.C. 347 )

 

  플라톤은 세계를 언제나 존재하되 생성하지 않는 것의 영역과 언제나 생성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의 두 영역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전자는 영원불변한 모범들의 세계이고, 후자는 그 모범을 본떠서 만든 덧없는 모상들의 세계다. 이는 각각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 세계이다.(여기서 존재하되 생성하지 않는 것이란 물론 파르메니데스의 부동의 일자에서 유래한 것이고, “생성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우리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위대한 종합을 볼 수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현상 세계 너머에 궁극적인 참된 실재인 이데아의 세계가 있고, 현상 세계는 이데아의 세계를 모방하고 있는 것이다. 이데아의 세계에는 수많은 이데아들이 존재하고 그 중심에는 좋음의 이데아가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이데아란 무엇인가? 이데아를 이해하는 쉬운 방법 중 하나는 이데아라 쓰고 정의(定義,definition)라고 읽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시계란 무엇인가? 우리는 시간을 알려주거나 측정하는 도구를 시계라고 한다. 이것이 시계의 이데아다. 우리가 x를 시계라고 부르는 것은 x가 시계의 이데아를 분유(分有;나누어 가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데아를 이해하는 다른 방법도 있다. 쉽게 말해 현실의 모든 동그란 것들이 어느 정도는 원의 특성을 갖는 건, 진짜로 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그란 것들을 볼 때 진짜로 보아야 할 것은 원이다. 진짜로 본 것들, 진짜로 보아야 할 것들이 바로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데아가 있는지 알 수 있는가? 동그란 것에서 원을 보는 능력! 그것은 바로 이성理性, 즉 추상하는 능력이다.

  하나와 여럿일자(一者)와 다자(多者)의 문제라고도 부른다. 핵심은 보편자와 개별자와의 관계이다. 파르메니데스에게서는 그것이 존재로 최초로 언명되었고, 플라톤에게서는 보편자인 일자로서의 이데아와 개별자인 다자로서의 현상간의 관계로서 제시되었다. 그래서 플라톤은 보편자(이데아)와 개별자(현상 세계) 간의 모방과 분여의 관계로서 하나와 여럿의 문제를 다루고자 하였다. 이 문제가 문제인 이유는 개별자는 우연적이고 법칙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지성에 의해서 파악할 수 없는 것인데, 우리는 결국 보편자의 형식을 통해서만 이해하고 과학에서의 수학적 법칙이나 이론의 적용, 예측의 형태로서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유사하지만, 다자성을 인정한다. 현상 세계의 유사한 것들은 이데아라는 본질을 갖지만, 이데아끼리는 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하나는 모든 것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으로, 파르메니데스적이지 않다.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의 일자성에 대항해 이데아의 다자성을 주장한다. ‘좋음()의 이데아는 일자성을, ‘그 밖의 이데아들은 다자성을 지니는 것이다.

  플라톤에 대한 큰 오해 중 하나는, 그가 이데아라는 생기 없는 동일자의 체계 안에서 모든 개별자의 생성을 부정했다는 그런 류의 오해이다. 그것과는 반대로 플라톤은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가 되려고 했다. 즉 그는 감각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생성한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형상(eidos)’에 대한 앞선 이해가 전제되어야한다고 보았다.(대개의 경우 플라톤은 존재론적 관점에서는 이데아, 인식론적 관점에서는 형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플라톤에게서 형상(eidos)’은 영혼의 눈(이성)으로만 볼 수 있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변화하기 위해서라도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형상있는 것들의 가능한 조건이다. 즉 형상이란 있는 것들의 존재로서 그것들을 근거 짓는 어떤 것이다.

 

 

홀림

 

  드디어 플라톤을 만나는 줄 알았는데, 또 파르메니데스의 유령이 등장하여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내가 처음에 뭐라고 그랬는가? 우리는 고대인의 반석 위를 오르고 있다. 제사를 잘 지내지 않으면 망령이 되살아나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따라서 과거의 질문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것임을 깨닫는 일이 우리 철학함의 시작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작정하고 파르메니데스를 다루려고 한 건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이렇게 돼버렸다. 길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나도 길을 따라가고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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