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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와 살기03] 기억 하나쯤_이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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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393회 작성일 20-07-16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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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와 살기03]

기억 하나쯤

이기록

 

 

얼마 전 문화기획하는 분과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평범한 개인의 삶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보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그것을 구체화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주변에 살고 있는 평범한 인물이 한 장소에서 살면서 있었던 어떤 여정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들려주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를 기획이었다. 그 이야기가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에 어떤 흐름을 가지고 연계해서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구체적인 방안까지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주 괜찮은 프로그램이 될 듯 했다.

오늘은 비만 엄청 쏟아붓더니 조금씩 잠잠해지기에 겸사겸사 몸도 찌뿌둥해서 이리저리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장마라 계속 날씨는 흐리지만 비가 그쳐(가끔 잔잔한 빗내가 들어오기는 한다) 가뿐히 걸을 만했다. 지난 대화의 기운이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 스스로 의미를 두면서 걸을 수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는 부산으로 이사하고 계속 살아왔던 곳이다. 중간에 몇 번의 이사를 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린 나이에 이사를 해서 30년 넘게 40년 가까이 이곳에 계속 정착하고 살아왔다. 주변에 아파트가 많이 생겼지만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도심 속의 섬처럼 아파트에 둘러싸인 공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 건물이나 길의 모양은 다르게 변했지만 나름 크게 변하지 않고 버텨준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이 고마운 부분이긴 했다)

내 삶의 시작점이랄까. 그런 것들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여 살던 곳들을 아주 오랜만에 찾아가 본다. 예전 집들이 모두 20분 정도 거리에 자리잡고 있지만 쫓기듯 살아온 삶이라설까 마음을 먹고 찾아나서지 않으면 찾아가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매번 과거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지는 않으니까.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 부산에 이사오기 전의 살던 곳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찾아가다 보니 어렴풋하게 기억이 나는 길들이 있었다. 맨 처음 손수건을 달고 입학을 했던 학교부터 좁디 좁아진 길들을 보며 참 많이 컸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있었다. 그후 트럭에 짐을 싣고 맨 처음 이사를 온 장소.

한곳에 오래 살면 어떤 장소에 가든지 사소한 사연 하나쯤은 기억나기 마련이다. 맨 처음 이사를 하고 왔을 때 들어가게 된 학교에서 (1학년 2학기 말쯤이었던 것 같다) 익숙하지 않은 말투로 먼저 다가와 준 친구가 기억이 난다. 동네마다 내리막이 많았었고, 그해, 올 겨울에 보지 못했던 눈이 무릎 정도까지 아주 많이 내렸었다.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고 비닐로 미끄럼도 탔었는데 이제 기억이 났다. 친구의 이름까진 기억나지 않지만 나보다 한뼘 정도 더 큰 아이 덕분에 적응을 잘 할 수 있었다.

그때 살던 집은 그래도 남아있다. 바뀐 주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짐들이 많이 쌓여 있다. 좁은 계단을 따라 옥상에 올라가 옆집 아이를 부르기도 했었는데, 비슷한 나이 또래가 10여 명 정도 있었기에 매일 나와 놀았다. ‘응답하라드라마 같은 일들이 매일 일상처럼 벌어지던 장소. 예전 공터였던 곳은 이제 건물이 들어선 것 빼고는 바뀐 게 없다.

시간은 변했지만 장소는 변함없다는 것. 요즘 같은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변함없이 머물러 있는 장소를 잠시 만날 수 있음은 한편으론 서글프고 한편으론 그립다. 한동안 잊어버렸던 그리움과 해후한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중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동네란 말은 기억을 품고 있다. 그 기억들이 거미줄처럼 엮이면 그게 삶이고 역사일 거란 생각이 든다. 지금 내리는 게 비가 아니라 눈이었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을 하며 굵어지는 빗방울을 피하며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