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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람이 걸어가_김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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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692회 작성일 20-07-06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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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사람이 걸어가

 

김석화

 

네 명의 발이 폭우 속을 둥둥 걸어갔다.

하필이면 우린 이런 날 회식을. 회식은 이런 날이지, 까르르. 드디어 이 비를 뚫고 가보는군요 히히.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는 후렴을 저마다 보탰다. 신이 난 장맛비 속에서 더불어 신난 발들이 키득거렸다. 유명하다는 어느 국밥집으로 네 사람이 걸어간다. 등에 서로의 빈 처지를 기대고서.

책방 휴무 날이었다. 불 꺼진 책방에 d가 먼저 자리 잡았다. 출판사에서 녹취록 푸는 알바를 받아 작업하러 간다고 했다. 요즘 매일같이 출근하는 길고양이 로쟈도(우리가 부르는) 입장. 책방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고양이 사진을 d로쟈 통신으로 전해왔다. 책방 동무 둘이 그렇게 있다가 갈 예정이었다. 나는 늘 그렇듯 일주일치 장을 보고 집안일을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쉽게 보냈던 지원 사업 월말 서류 작업이 그 날은 순조롭지 못했다. 엑셀이 안 되다 어찌어찌 겨우 해결했는데, 공인인증서가 없다며 노트북이 말썽이었다. 책방 usb에 저장한 인증서가 생각나 늦은 오후 빗속을 걸어 책방에 갔다. 책방의 노란 불빛이 촛불처럼 동네에 일렁이고 있었다. 작업하던 d와 자고 있던 로쟈를 보니 까칠해졌던 마음이 잠시 순해진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뒷목이 뻐근해질 때쯤 k가 등장했다. , 우리의 맥가이버 여사. 나는 살았구나 안도했다. 나뿐만 아니라 로쟈에게도, d에게도 나무둥치 같은 k. 책방에서 한 시간 거리에 살고 있는 k가 퇴근 후, 책방 쉬는 날인데도 오다니. 무조건 환대다.

청년 미술 공모전에 처음으로 작품을 낸다고, 책방에서 가끔 작업을 하던 b도 입장.

k의 손은 맥가이버보다 훌륭했다. b는 그림을 마무리했고 d는 우리의 꼬드김으로 작업을 멈췄다. 그 멈춘 손은 책 사람, 장소, 환대언저리에 있었는데, 우리가 마치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며 그 책속에 들어앉아 있는 듯 했다. 계획에 없던 만남이었고 등장이었고 환대였다. 반가움과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는 이들에게 밥을 먹이는 것. 회식합시다. 그럽시다. , 신난다. 냐옹매옹매옹.

고양이 로쟈는 책방에 두었다. 화장실용 모래와 밥을 챙겨 두고서. 얼마 전 비가 많이 내리던 밤, 나가기 싫어 구석에 숨는 녀석을 하루 재웠는데 다행히 책들이 무사했다. 비 오는 날은 책방에 재웁시다. 로쟈 엄마이자 아빠인 우리는 결정했다. 엄마, 아빠들은 회식하러 갈게 로쟈.

책방 열쇠를 나눠가진 네 사람이 폭우 속을 걸어갔다.

책방에서 맺어진 인연들. 누구하나 나을 것 없는 처지를 나눠가진 사람들. 그나마 나눠가질 수 있는 건 이 작은 책방이라는 장소였다. 고루고루는 아니어도 고운 마음으로 내어주고 싶었다. 우리 중 가장 어리지만 우울증 약을 먹고 있는 b. 자신의 몸을 떠나고 집도 떠나 부산으로 이주한 d. 우리 중 가장 씩씩하지만 일 년에 한 번씩 재계약을 해야 하는 k. 그리고 가장 나이가 많고 느릿해 잔손을 필요로 하는 나. 서로의 잔손이 되어주고 마음 한 귀퉁이도 내어주고, 가끔 눈물도 받아내는 귀한 사람들이다. 오랜 인연이 아닌데 이들이 참 애틋하다.

며칠 전 서울에 계신 d의 어머니가 내게 문자를 보내왔다.

그 곳에서 좋은 친구들 만나 다행이라고. 먼 곳에 보내놓고 걱정이라 잘 부탁한다고.

우리가 d를 챙기는 것보다 d가 우리 저마다를 섬세하게 돌본다고, 제가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하마터면 진심을 말할 뻔 했다.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마시라고 간단히 보내고는 이내 눈물이 잠깐 올라왔다. 서로를 향한 돌봄의 마음. 그 날은 함께 하지 못했지만 gj까지. 책방을 지키며 나는 그들을 돌보고 싶고, 그들로부터 돌봄도 받고 싶다.

다음 폭우엔 여섯 사람의 발이 찰방거리며 걸어갈 것이다. 회식하러. 아 한 사람이 더 있구나. 가끔 등장하는 h 아저씨까지.

 

 

이상우 소설 <두 사람이 걸어가> 제목을 빌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