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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생의 독서일기02] 소설의 맛_김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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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432회 작성일 20-06-25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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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생의 독서일기02]

소설의 맛

- 박완서, 그 남자네 집을 읽고

김재홍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을 다시 꺼내 읽었다. 얼마 전 읽은 한 에세이의 구절 때문이었다. 거기서도 그 남자네 집을 인용하고 있었다.

 

우연하게도 나는 오늘 박완서의 그 남자네 집을 여기저기 뒤져 읽고 있었다. 보리고추장을 넣어 끓인 민어찌개, 날렵한 손놀림으로 잔칼질을 해서 쑥갓과 실파를 넣고 끓인 준칫국, 밀가루를 오래 치대 들기름에 쫄깃하게 부친 밀전병……

- 박상미, 나의 사적인 도시, p. 161.

 

  저자는 음식에 대해, 즉 현대 사회의 영양 주의에 빠진 간소한 식습관과 대비되는, 제대로 요리를 해서 먹는 음식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소설의 묘사를 가지고 온다. 위의 대목은 소설 속 주인공이 시집을 간 집에서 해먹는 요리 풍습을 묘사한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오로지 먹는 일에만 신경을 쓰고 사는(p.124)’ 시댁의 식도락 취미에 결국에는 그만 질려 하고 만다.

  실제 소설 속에는 위의 음식들이 만들어지는 과정부터 그것을 먹는 풍경이 훨씬 다채롭고 맛깔나게 묘사된다. 한 마리 커다란 민어가 찌개가 되고 회로 쳐지고 야들야들한 양념구이가 되는 장면, 잘 마른 굴비를 짝짝 찢어 먹는 장면, 지극한 정성을 들인 오이소박이 하나까지. 그야말로 미각을 자극하는 묘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소설을 다시 꺼내 읽으며,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그 맛을 더듬어보고자 한 것이다.

 

  물론 그 남자네 집은 먹는 묘사가 주를 이루는 소설이 아니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의 시점을 오가며 첫사랑의 기억을 다룬다. 주인공 는 이사한 후배의 동네가 오래전 자신과 그 남자로 묘사되는 첫사랑이 살던 동네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우연히 그 남자의 옛집이 아직 허물어지지 않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자연스레 소설의 시점은 그 남자가 사랑에 빠졌던 1950년대 초 전시 상황으로 돌아간다.

  전쟁의 광기가 서울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뒤, 집안 남자들은 모두 죽고 남은 의 가족들은 피난 못 간 서울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살게 된다. 먹고사는 문제를 닥치는 대로 궁리해야 했기에 는 어쩔 수 없이 미군부대로 취직자리를 얻고, 어느 퇴근길 그 남자를 만난다. 각자 집안의 궁색한 처지를 털어놓으며 둘은 가까워지고, 그렇게 첫사랑이 시작된다.

  전시의 그 남자와의 치열했던 사랑은, 폐허가 된 서울, 궁색하고 남루한 사람들의 행색으로 묘사되는 풍경과 합쳐져 그야말로 황홀한 현기증(p.70)’처럼 이루어진다. ‘는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자신을 정신없이 몰입시켰던 그 열정, 그 남자에게 뿜어져 나온 그 힘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그 살벌했던 날, 포성이 지척에서 들리는 최전방의 도시, 시민으로부터 버림받은 도시, 버림받은 사람만이 지키던 헐벗은 도시를 그 남자는 풍선에 띄우듯이 가볍고 어질어질하게 들어올렸다.”(p.70)

 

  그러나 그 위태롭고 치열했던 열정은 전후의 지독한 빈곤에 맞서 생을 향해 내뿜는 사람들의 어지러운 몸짓과 산만함에 묻혀 사그라들고 만다. 현실을 깨달아버린 것처럼, ‘는 전후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려는 분위기 속에서 그 남자와 함께 있던 중심에서 자신이 한 발짝 물러나 있음을 실감한다. 결국, ‘는 적당한 혼처를 골라 그에게 청첩장을 건네는 것으로 이별을 통보한다. ‘는 현재의 시점에서 그 남자에게 이별을 통보한 이유를 회상하며 그의 처지가 도저히 새끼를 깔 수 없는 만신창이였음을, 자신이 탄탄하고 안전한 집(p.101)”을 원했음을 뒤늦게 의식한다.

  박완서의 소설에는 시간이 지나고 난 뒤 내면의 자의식적 깨달음을 고백하고 성찰하는 이러한 방식의 서술이 곳곳에 스며있다. 마치 라는 인물을 둘러싼 세계와 그곳에서 벌어진 일 모두가 회상이라는 도마 위에 올리어져 결국에는 깊은 곳에 도사린 어떠한 인식을 발견해 내려는 듯 말이다. 이별의 상황을 반추하며 내면을 들여다보는 노년의 화자의 애환이 드러나는 대목을 읽고 있노라면, 연륜으로만 깨달아지는 삶의 어떤 면을 슬쩍 들여다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박완서의 소설은 작가 자신과 화자로 내세운 주인공을 동일시하며 읽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기에 생생한 묘사와 인물의 내면에서 끌어올려진 깊은 성찰이 담긴 고백이 마치 작가 자신의 목소리인 것처럼, 호소력 짙게 들리곤 하는 것이다.

 

  『그 남자네 집은 첫사랑의 기억이라는 소재가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끌어가지만, 그 외에도 다른 인물과 상황이 겹쳐져 힘을 잃지 않고 결말부까지 견인되는 소설이다. 여자로서 겪는 생의 아픔과 슬픔과 기쁨, 한 집안의 흥망과 삶의 갖가지 부침, 죽음과 나이 듦, 재회와 용서와 치유의 서사가 소설을 생동감 있게 장식하며 결국 그 모든 것과 이별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소설 속의 모든 것은 하나하나의 재료를 섞어 정성껏 요리한 것처럼 생경하고 몰입도 있게 묘사된다. 전쟁의 궁기와 척박함부터 생존과 살림살이를 향한 몸부림, 수치와 아픔, 후회, 시간의 흐름과 기억의 회상까지. 소설의 갖은 요소들이 소리를 내고 냄새를 풍기며, 어우러진 색채를 전달하며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책을 펼쳐 한 글자 한 줄 한 단락 읽어가며 곱씹는 모든 것은 결국,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다채로운 맛으로 전해진다. 우리가 음미하게 되는 것은 사랑의 맛, 기억의 맛, 궁극적으로는 문학의 맛, 소설의 맛인 것이다.

 

 

박완서, 그 남자네 집, 현대문학,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