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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는 말이야01]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어_박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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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496회 작성일 20-06-18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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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는 말이야01]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어

박소연

 

 

  동글동글한 얼굴의 신랑을 꼭 닮은 녀석이 뒤뚱거리면서 나에게 다가와 장난감 전화기를 내민다. ‘여보세요놀이를 하자는 것이다. 놀이는 간단하다. 내가 전화기에 대고 여보세요 거기 00이 있어요?’이러면 녀석은 내가 못 알아들을 그만의 언어로 어버버버말을 한다. 그러면 내가 다시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와 같은 대화를 이어가면서 녀석이 장난감 전화기를 두고 다른 놀이를 찾을 때까지 반복하면 된다.

  아이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집에서 이렇게 전화를 많이 하나?’하는 생각도 들고, ‘나 때는 엄지와 새끼손가락으로 전화를 표현했는데 요즘은 장난감 전화도 스마트폰으로 나오네?’처럼 생각은 꼬리를 물고 흘러 내가 언제부터 스마트폰이라는 녀석을 사용했었는지내 기억 속 통신기기의 시간을 좇아보았다.

  초등학교 6학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그쯤 유명 아이돌 가수가 삐삐 광고를 했었다. 꼭 그 아이돌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그즈음 세상은 온통 삐삐라는 기기를 통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유행가 가사에도 꼬박꼬박 삐삐는 들어갔다. “삐삐 쳐도 아무 소식 없는 걸~” 나는 엄마에게 사달라고 졸랐는데, 1등 하면 사주겠다고 약속하셨다. 물론, 나는 삐삐를 갖지 못했다.

  삐삐라는 것은 어떤 암호와도 같은 번호를 남길 수 있어서, 비록 일방향이긴 해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고, 급한 호출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 시절엔 짝사랑하는 대상에게 혹은 친구들에게 별일 아니어도 보내보고 싶었고, 나는 연락받을 삐삐가 없어 그저 좋아하던 아이돌 가수의 삐삐 사서함에 연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다가 중학교 2학년 여름에 나는 더 멋진 기계를 가지게 되었다. 나의 오랜 투쟁과 평생 무언가를 갖고 싶다고 하지 않던 딸이 너무 단호한 태도를 내보이자, 엄마도 조건을 대폭 내렸고 결국 나는 그 멋진 물건을 손에 쥐게 되었다. ‘싸이언이라는 이름의 폴더폰이었는데, 아마도 우리 반에 휴대전화를 가진 아이들의 대부분은 같은 기종이었다. 그것은 회색에 아무런 디자인도 없었는데, 그 시절 휴대전화를 오랫동안 쓰신 아빠의 애니콜보다 내 것이 더 작고 멋지다는 생각에 너무 행복했었다. 그 전화기로 문자로 하고, 친구들과 전화도 하고, 컬러링(그 시절에는 반드시 멋진 컬러링을 해야 할 것만 같았다)도 하고, 예쁜 폰줄을 사기 위해 용돈을 쓰기도 했다.

  상급 학년으로 진학하면서 나의 휴대폰도 점점 진화했다. 휴대전화는 더 작고 얇아졌고, 탈부착형 카메라가 휴대전화 속으로 내장되었으며, 흑백에서 컬러로 심지어 폴더폰을 닫은 채로 앞에 글씨가 뜨기도 하고, 심지어 뚜껑(?)이 없어지고 휴대전화 전면에 화면이 뜨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스마트폰을 사용하기까지 휴대전화를 네다섯 개는 바꾼 것 같다. 고장 때문이라기보다는 좀 더 멋진 휴대폰을 사용하고 싶은 단순한 마음이 컸던 것 같다.

  나의 휴대전화는 지금의 신랑인 그 당시 남자친구가 내 손을 이끌고 휴대폰 매장에 가 사과폰을 골라주면서 교체 주기가 길어졌다. 그 전까지 6~7년 동안 거의 1~2년에 하나씩 휴대전화를 바꾼 셈이다.

  스마트폰은 그 이전 폰들에 어떤 기능이 있었는지 생각나지도 않을 정도로 신기했다. 마치, 휴대전화가 아닌 컴퓨터 같았다. 그러나 내가 스마트폰을 활용하는 능력은 점점 쇠퇴해갔고 내 어린 시절처럼 젊은 친구들은 스마트폰을 척척박사처럼 다루었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나보다 젊은 동료들과 SNS도 해보았지만, 결국엔 여러 핑계를 대며 SNS에 시들해졌다. 어느 순간, 나는 문물을 따라가기 버거워졌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스마트폰이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보면 아주 유용하지만, 꽤나 큰 골칫덩어리로 여겨진다. 어린 연령에서 스마트폰 사용은 주요한 골칫거리로 여겨지며, 주요 학술논문이나 기사에서도 여러 문제점을 모아 쏟아내는 것을 보면 확실히 문제이긴 한 모양이다. 나는 이런 글들을 보면서 이러한 기기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 최근의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 시절의 기사를 찾아보면 학생에게 삐삐 사용을 허용할 것인가에 대한 갑론을박이 있었는데, 매체와의 싸움은 여전한 것 같다.

  언제가 나는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있다. ‘너무 빨리 변해가는 세상에서 가끔은 좀 천천히 가, 아니면 잠시 쉬어 가도 된다라고 말이다. 이 속도의 시대에서 정보는 스마트폰에 의해 손쉽게 얻어지고, 학습의 도구가 되기도 하며 지식을 얻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생활의 편리성과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발생하는 신체적 건강문제나 정서적 사회적 문제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이 모든 장단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국 스마트폰을 막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는 밀어내고 거부할 수만은 없는 단계가 된 것 같다. 물론 나 또한 말도 잘 못하는 딸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어 스마트폰을 사달라고 하면 어떨까 생각하면 쉽게 오케이라는 말이 나오진 않는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이들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하는 법과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할 때인 것 같다. 우리가 그 시절 삐삐와 휴대전화를 사용하고도 건강한 사회인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