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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집의 그 여자_김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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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2,314회 작성일 17-06-29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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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7.06.29

찻집의 그 여자

김기영

 

 

너무 맛있었던 집인데 다시 가보면 없다. 손님도 꽤 있고 맛도 괜찮아서 오래도록 유지될 것 같았는데 이제 막 세수라도 한 듯 반질반질한 얼굴로 바뀐 간판을 목도하면, 준비 없는 이별에 맞닥뜨린 사람처럼 당황한다. 그 맛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조바심, 이제는 그 맛을 볼 수 없다는 쓸쓸함이 갑자기 밀려온다.

세상은 쉽게 변하고 빨리 잊혀 진다. 변화하지 않으면 뒤처지는 것이라는 테제에 점령당한 환경에서 정체불명의 무엇인가에 늘 쫒기며 산다.

 

어느 한 때에, 전통찻집을 한 적이 있다. 녹차에 대한 관심이 반짝 높아진 시점이었고 대학교 앞이나 시내에 전통찻집들이 하나 둘씩 늘어갈 때였다. 김수철의 음악과 황병기의 가야금, 소지로의 오카리나 연주곡들이 비슷비슷하게 흘러나왔고 강렬하면서 어딘가 달콤함이 숨어있는 계피향이 제 먼저 반기며 맞아주던 집들. 나의 찻집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녹차와 전통음료를 팔았는데 우리 찻집에서 제일 인기가 많은 품목 중의 하나가 대추차였다. 나의 대추차 레시피는 손이 많이 가는데 대추를 끓여서 껍질과 씨를 걸러내고, 불린 찹쌀을 갈아서 함께 끓인다. 그때 찹쌀의 양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 때문에 나름 섬세하게 조절을 해야 한다. 조금만 많아도 걸쭉해지고 좀 적다 싶으면 밋밋해진다. 정성을 들여서인지 손님들이 좋아해주었다. 좋은 대추를 사기 위해 일부러 밀양까지 가는 일도 마다않고 유자가 나오는 철엔 남해를 갔다. 차 한 잔에도 장인의 정신이 깃들어야한다, 이런 거창함은 아니고 그저 재미가 있어서였다. 한 시절 부흥하던 우리차 마시기 운동(?)은 또 다른 트렌드에 밀려 눈치 채지 못하는 순간 하나 둘씩, 인사도 없이 사라져갔다. 물론 나의 찻집도 비슷한 운명이었다. 당시는 개량한복이 대중화되기 전이었는데 때때로 지나는 이의 눈길이 머물렀던 진달래색 저고리와 연보라색 치마, 남색 끝동이 대어진 연하늘색 저고리와 남색 치마는 찻집보다는 조금 더 연명을 하였으나 어쨌든 사라지는 것들과 운명을 함께 했다.

 

아주 오랫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찻집이 있다. 그곳은 근대역사관을 끼고 남포동 쪽으로 내려가는 길 맞은편에 자리 잡고 있다. 보이차가 주 메뉴인데 갈 때마다 손님도 별로 없이 여주인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가 거의 대부분이다. 어떤 날은 주인조차 인근에 마실 나가 있기도 한다. 달세는 어떻게 내나? 밥은 먹고 사나? 괜히 안 해도 될 걱정을 내가 하고 있다. 늦은 시간에 들린 적이 있다. 여주인은 새로 온 건데 맛 보시려나하며 익숙한 손놀림으로 보이차를 내준다. 마침 아무도 없는 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얼마나 하신 거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갸웃갸웃하더니 아마 한 30?, 이라며 덤덤하게 말한다. 30년이라니돈도 안 되는 차() 장사를 30년씩이나? 혹시 건물주인가? 아니란다. 그러고 둘러보니 곳곳에 시간이 내려앉아있다. 오래된 물건들, 엘피판, 차 주전자들그 속에 한 여자가 서성인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찻집도 여자도 자연스런 풍경이다. 어쩌다 그 길을 지날 때면 그 찻집의 안위가 궁금해 멀리서부터 눈을 모은다. 아직은 그대로 있다. 모두가 바쁜 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라져가는 중에도 한 두 개쯤은 제자리를 지켜주는 것들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날 때 거기에 있어달라는 거, 욕심이겠지. 욕심이구나

 

 

 

- 연극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