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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비평> 신뢰할 만한 풍경에 관하여_정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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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676회 작성일 19-10-31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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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할 만한 풍경에 관하여

- 윤은숙 개인전, ‘너머 깃든

 

울산 갤러리 WALL, 2019.11.16.-11.30.

부산 달리미술관, 2019.12.02.-12.31.

부산 민주공원, 2019.12.14.~12.31.

 

 

정재운

 

  

작품 <충만의 숲>(162.2×224.2cm_Acrylic on canvas_2019) 앞에 서서 부상하고 가라앉는 갖가지 느낌들을 들여다봅니다. 개중 가장 오랫동안 필자의 마음을 붙드는 걸 떼어내 확인하니 신뢰더군요. 알다시피 신뢰하다(rely)의 어원은 단단히 묶다라는 라틴어 ‘religo’에서 왔다지요. 작품을 통해 신뢰라는 어휘를 떠올렸다는 것은 작품(작가)이 수용자와의 어정쩡한 거리를 바투 묶어버렸다는 말일 겁니다. 이번 전시 전까지, 몇 차례 그녀의 작품을 만난 적 있습니다. 그 몇 번의 만남이 날 꽁꽁 묶어버렸나 보죠. 항복하듯 신뢰의 끈을 잠시 느슨하게 풀고, 작품을 톺아봅니다. 구체를 이루고 있는 초록의 군집이 화폭의 가운데에서 오로라에 휩싸여 있습니다. 지구라는 작은 별이 태양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공전하듯, 윤은숙이 창조한 이 구체 역시 저 홀로 떠 있는 게 아니라 화폭 밖으로 비집고 나온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뭇 별과 별들의, 다른 작품과 작품들 속의 상()과 상들과 만나고 있으리란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이 같은 읽기에 함부로 신빙성을 부여할 수는 없습니다. 신뢰성(reliability)이 사실 여부, 참 거짓을 떠나 안정된 일관성의 세계에 속한 언어라면, 신빙성(credibility)은 정확한 참을 의미하는 존재론적 개념의 언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뢰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기대와 믿음의 향기가 신빙성이란 말에는 들어있지 않지요. 당신이 그녀의 작품에서 허공에 뜬 풀무더기만 보았다면, 어서, 이편으로 건너오시라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부터 필자는 신빙성 없는, 그러나 신뢰로 가득 찬 세계의 언어로 윤은숙의 작품을 읽기 시작할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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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만의 숲>(162.2×224.2cm_Acrylic on canvas_2019)

   

그렇지만 말예요,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라는 의문부터 채워 그 신뢰의 기준쯤은 마련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럴 땐 뭔가 거창한 것에 기대기 쉬운데, 어디 그녀의 작품이 그러하냐고요. <생명의 흔적>(112×145.5cm_Acrylic on canvas_2019)에는 그야말로 작은 생명에 관한 서사가 무궁무진하게 들어있습니다. 작품을 마주한 이들은 객관이 배제된 세계에서, 오롯이 주관적 자아가 불어넣은 숨결이 약동하는 서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갖가지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저마다 재구성한 사실(reality)과 진리(truth)를 사후적으로 추인해갈 텐데, 이 과정에서 객관이 라틴어 오부젝툼(obiectum)에서 왔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은 우리가 마련하려는 신뢰의 기준에 퍽 중요한 누빔점을 제공하는 듯합니다. 건너편(의식 안)으로 던져버린 표상이라는 어원을 통해 객관이란 데카르트와 로크를 거치기 전까진 의식 바깥의 인식 대상으로 설정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던 것이 칸트와 피히테를 통하여 근대적 자아가 확립되면서 주관적 자아는 객관적 대상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자, 우리는 주관적 자아가 아닌 모든 걸 객관적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죠. . 근대가 낳은 합리주의나 법과 기술, 제도 따위는 모두 이 객관을 토대로 합니다. 이쯤 작품 하나를 더 들여다볼까 합니다. <기억을 불러 일으켜>(162.2×130cm_Acrylic on canvas_2019), (53×45cm_Acrylic on canvas_2019)에는 만면에 평화가 흐르는 머리 하나가 있습니다. 흡사 불상을 떠올리게 하는 이 고요한 얼굴엔 외부로 향하는 창()을 닫()음으로 내면을 향해 활짝 열려있습니다. 그의 내면에는 울창한 자연이 담겨있군요. 그렇다면 숨이 붙어있는 모든 것을 조화롭게 품고 있는 저 자연(이데아)은 주관의 세계에 있는 것인가요. 객관의 세계에 존재하는 걸까요. 윤은숙의 작품들은 주관적 자아로부터 벗어난 객관의 역사, 즉 인식의 역사를 역행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녀가 캔버스로 옮기어낸 것은 마음이 실재를 구성하는 세계입니다. 그렇다고 의식 바깥에 존재하는 객관과의 균형을 포기한 위장된 평화도 아닙니다. 저는 기표 아래의 기의가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세계에서 최소한의 누빔점도 마련하지 못하고 결국 정신증에 걸려버린 작가 몇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 작업의 결과물을 싸잡아 좋다 나쁘다, 로 갈음할 수는 없겠지요. 개중엔 더러 뛰어난 감각으로 우리에게 시각적 충격과 고차원의 개념을 선사하는 이들도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작업에서 온화하고 포용적인 평화를 찾아볼 수 없음도 분명한 사실이지요. 윤은숙이 확보한 주관과 객관의 균형추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더듬어 짐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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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불러 일으켜>(53×45cm_Acrylic on canvas_2019) 왼
<기억을 불러 일으켜>(162.2×130cm_Acrylic on canvas_2019) 오

 

작가의 탁월한 균제미는 단순히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 <우연한 밭에>(116.8×182cm_Acrylic on canvas_2019)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여름, 올해로 3회째를 맞는 노동미술 에서입니다. 차별, 멸시, 편견으로 얼룩진 노동의 존재를 번듯한 것으로 바꾸어내려는 작품들을 면면이 만난다는 설렘의 가장 앞자리에서 윤은숙의 작품을 마주했습니다. 데칼코마니를 떠올리게 하듯 마주보는 두 얼굴 역시 그녀의 다른 작품들처럼 다양한 의미지형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노동이란 주제에 대입해보면 이렇게 읽을 수 있겠지요. 작가에게 있어 노동이란 마주보는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마주본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심연을 대면하는 행위이며, 행위 너머를 갈망하고 가닿으려는 의지의 형상화일 것입니다. 측면을 보이고 있는 두 얼굴은 이번에도 눈을 감았네요. 시각의 불완전성을 극기하는 과정에서 커다래진 귀는 날개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귀는 구멍이 뚫리지 않은 걸로 보아 외부의 소리보다 내면의 소리에 특화되어 있나봅니다. , 그렇다면 이들의 눈은 언제쯤 뜨일 수 있을까요? 너무 엉뚱한 상상인가요? 그들의 귀를 덮은 깃털은 언제쯤 다 날아갈까요? 추측건대 그리 오랜 세월이 남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푸릇푸릇한 대지 위에 피어난 진달래가 보이지요?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예감케 하는 봄바람이 작가의 붓 든 손가락 사이로 지나가는 듯합니다. . 윤은숙이 지닌 추는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아 그만한 무게를 만들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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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밭에>(116.8×182cm_Acrylic on canvas_2019) 
 

 

시간의 흐름은 주관과 객관의 경계를, 내면과 외면의 경계를 흐리마리 지우죠. 보편이라 여겼던 도덕 준칙도 시간에 따라 알량해지고, 시대에 따라 요구받는 역할과 상의 변화는 그 폭을 어림잡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만약, 인간의 삶이 바위처럼 단단해 흔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작품을 찾을 이유도, 창조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이즈음 윤은숙은 마침내 시간의 마모에 대해 깨달은 것처럼 보입니다. <빛을 품다>(45×53cm_Acrylic on canvas_2019)<빛나는 순간>(45×53cm_Acrylic on canvas_2019), 그리고 <춤추게 하다>(72.7×60.6cm_Acrylic on canvas_2019)에는 이전 작품들에서 볼 수 없었던 촘촘한 가로선이 인상적입니다. 이 변화를 알아차리자마자 필자는 영화 <토탈 리콜>(Total Recall, 1990)을 떠올렸습니다. 이 옛날영화 속에선 텔레포트(Teleport, 순간이동)로 꿈과 현실, 과거와 현재 사이를 오갑니다. 이때, 존재는 잔영을 남기지요. 위의 세 작품은 공통적으로 생의 만개한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이 순간은 모든 것을 옛날로 수렴시키고야마는 시간에 의해 사라질 찰나입니다. 옛날은 언젠가 현재였던 모든 시간이며, 매우 광활한 시간이지요. 그러나 동시에 기억의 영외지에 있는 시간까지 뭉뚱그려 옛날이라 부르긴 어렵습니다. 작가는 기억 속으로 빨려 들어갈 존재의 흩어지는 시간성을 화폭에 담기 위해 이 결(가로선)을 하나하나 그려 넣었을 것입니다. 그럼으로 작가가 획득하고자한 것은 무엇일까요. 필자는 이 행위를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재인식(recognition) 의지로 느꼈습니다. 이 의지는 저만의 인식체계를 세우는 일에 가닿으며, 그것은 체계에 속하는 대상이자 체계를 구상하는 주체이기도 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는 재귀적 행위입니다. 이 가위바위보의 순환행위는 외적 실재의 무게와 구조를 수동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작가의 의지의 반영이며, 동시에 부조리하고 불가해한 면으로 가득 찬 세계 너머의 지향입니다. 윤은숙이 캔버스로 옮기어내려 한 것은 그 너머에 깃든, 신뢰할 만한 풍경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