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빨

  • 자료실
  • 글빨

내가 아는 그녀는_김석화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793회 작성일 19-10-28 14:11

본문

내가 아는 그녀는

 

김석화



 

 내가 아는 그녀는 최저 시급 노동자다. 

 비정기적으로 일을 하다가 얼마 전부터 종일 근무를 시작했다. 나는 그 사이 무임금 가사 노동에서 반쯤 벗어나 무임금 책방 노동자가 되었다. 책방과 일터에 매인 후로 우리는 자주 못 본다. 각자의 공간과 노동에 묶이기 전, 우리는 비교적 시간에 자유로웠다. 페미니즘과 독서와 글쓰기와 관련해 비슷한 관심사를 나누고 서로의 사정을 나누었다. 그 사이 우리의 환경은 변했지만 가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서로의 글을 살핀다. 최소의 소비로 살아가는 그녀는 할인도 없는 책방에서 필요한 책을 구입한다. 그리고 눈처럼 소복한 목소리로 묻는다. 요즘은 마음이 어때요?

 내가 아는 그녀는 계약직 교사다. 

 교사들의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나 보였고 총총거리면서도 진중해 보였다. 늘 무언가로 바빠 보였는데 피곤을 내비치지 않았다. 학생들로 한숨 쉬기보다 그 아이들의 대견함을 이야기했고, 페미니즘을 통해 서로를 배려하는 태도를 가르치려 애쓰는 듯 했다. 몇 년 전 독서 모임에서 만났고 내가 그랬듯이, 그녀도 금세 함께 읽는 독서에 푹 빠져버렸다. 작은 책방을 좋아해 이미 많은 곳을 다녔던 그녀라 내가 책방을 열자 매우 기뻐해주었다. 책에 대한 애정과 공간에 대한 애정을 동일하게 실천하며 기꺼이 작은 책방들의 단골이 돼 주었다. 책방 행사에 참여하고 많은 책을 지르고, 가끔 책방 알바도 한다. 그리고 씩씩한 목소리로 내게 말한다. 제게 책방 맡기고 하루 쉬세요!

 내가 아는 그녀는 스무 살 대학생이다.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불안과 슬픔으로 가득 찬 어린 식물 같았다. 작은 접촉에도 물기가 배어나왔고 나의 스무 살을 보는 듯 해 마음이 쓰였다. 스무 살 넘게 차이가 나는 우리는 마음 속 우물의 깊이가 비슷해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신경정신과에 가는 날 책방에 가끔 들른다.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각자의 책을 읽고 공부한다. 여전히 약을 먹고 있지만 씩씩해도 되고 우울해도 되는, 내게는 한 사람이다. ‘아싸’의 자리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키워내는 중이다. 그리고 내게 말한다. 저는 가난해서 책은 많이 못 사지만 그래도 반겨주세요. (그녀에게 책방이 가끔의 둥지가 되기를)

 내가 아는 그녀는 어린 두 아이의 엄마다.

 글쓰기 동지로 만난 인연이 이젠 말없이 서로를 지지하는 삶의 동지가 되었다. 책방을 준비하고 이전할 때 그녀는 고된 일을 여러 번 도왔다. 항상 그랬듯이 말없이, 차분하게. 한겨울에도 슬리퍼를 신고,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그녀를 위해 나는 얼음을 사 두거나 얼려 두었다. 그녀는 어설픈 커피를 맛있어 했고 나는 고마웠다. 그녀는 여전히 어려운 책들을 혼자 읽어내는 중이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가끔 낯선 책을 주문하고 그러면 나는 궁금해서 물어본다. 책방에 앉아 찬 커피와 따뜻한 커피를 마주하고 그렇게 이야기 나눈다. 저녁 무렵 슬리퍼를 신고 까만 봉지에 맥주를 사 온 날의 그녀를 잊을 수가 없다. 생일이라 들렀다고. 그리고 날 응시하듯 문자를 보낸다.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내가 아는 그녀는 인디밴드 가수다. 매일 술 마시고 노는 것 같은데 매일 책을 읽는다. 내 일의 속도가 느려 투덜거리지만 책방에 오면 사부작거리며 뭔가를 하고 간다. 술도 마시고 간다. 내가 아는 그녀는 시골 생활을 위해 이사를 갔는데 부산에 올 때마다 책방에 온다. 내가 아는 그녀는 책방에서 페미니즘 독서 모임을 만들었고, 또 다른 그녀는 한동안 약속을 책방 근처로 잡아 지인들을 데리고 왔었다. 또 내가 아는 그녀는 인원이 적은 문학읽기모임을 함께 꾸려나간다. 같은 소설을 일 년째 함께 읽으며.

 내가 아는 그녀들.

 

 슬프거나 외롭거나 힘이 들 때 나는 책방에 앉아 그녀들을 떠올린다. 더 부를 수 있는 사람들. 더 부르고 싶은 이름들. 그녀들의 애정과 수고로움으로 책방은 이제 일 년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