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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네 집은 아니니까요_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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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519회 작성일 19-08-09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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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네 집은 아니니까요.

 

인하

 

당신이 여기서 태어났다는 걸 증명할 수 있나요. 이 한마디가 가리키는 것은 어느 드라마 속 기구한 여주의 사연만은 아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국경을 넘은 어머니를 따라, 줄곧 미국에서 살았다. 그런데 미국인이라는 것을 증명할 서류는 없다. 그럼 너는 미국인이 아니네. 당신네 집으로 돌아가세요. 그렇게 한 여자가 일평생을 일군 자리에서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어디인지 도 모르는 ‘집’을 향하는 버스 안 그녀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비로소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아님 마침내 집에서 쫓겨난 것일까. 송환과 추방의 의미는 언제부터인가 닮아있다. 

 

여기, 태국에도 이렇듯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하지 못한 채 귀신처럼 구천을 떠도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가령, 잦은 내전과 일상을 비집는 폭력의 위협으로부터 도망쳐 온 미얀마 소수민족들은 태국의 국경지대에 마련된 외딴 캠프에서 기약없이 삶을 이어간다. 미얀마내 끝없는 분쟁, 진전없는 평화의 절차 속에서 어느덧 캠프는 난민 아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집이 되어가고, 다만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어른들의 기억을 통해 배울 뿐이다. 하지만 정작 태국은 난민들의 송환날짜만을 애타게 기다린다. 도리어 그들이 내쫓긴 그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이젠 집이 되어버린 이 집에서 쫓아내기 위해 골몰하는 것이다.

 

사실, 패권의 다툼 속에서 명멸하던 숱한 지배권력의 그늘에서도 한참 동떨어진 채, 우거진 밀림의 수풀 속을 누비고 다니던 이들 소수민족에게 자신을 증명하는 건 이웃이었지 기록으로 남겨진 출생증명서도 자신에게 부여된 식별번호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숲을 가로질러 국경이 생겨나고 태국어와 태국의 행정체계로 숲이 뒤덮여 가는 동안 이들은 국경만 넘으면 모두 하나같이 불법체류자이자 동시에 집 잃은 난민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곧 이 집의 구성원임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언제든 합법적으로 쫓겨날 수 있음을 의미했다.(이를 스콧은 보상과 처벌을 매개로 국가가 어떻게 국민들을 길들여 왔는지 보여준 바 있다) 

 

당신의 집은 어디인가요. 그것을 증명할 수 있나요. 그렇다면 이 물음 앞에 우리는 무엇을 꺼내놓아야 할까. 우리는 살아 남기 위해 어떻게 스스로를 증명해야 할까. 미얀마와 국경을 마주한 태국 북부의 산속 작은 마을에서 만난 아카족 여성, 부모들이 출생신고를 하지 않은(어쩌면 못한) 탓에 국적이 없다던 그녀는, 평생 자신이 속한 마을밖으로는 떠날 수 없다고 했다. 그럼 지금이라도 그 출생을 증명할 순 없을까. 그녀가 말했다.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