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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성달팽이_장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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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2,227회 작성일 17-06-15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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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 17.06.15

목성달팽이

장민규

 

 

목성은 더듬이가 달린 머리를 내밀고 태양계를 천천히 떠날 것처럼 생겼다. 사진이나 그래픽으로 커다랗게 보았던 목성을 천문대 보조관측실 망원경으로 볼 때면 항상 그랬다. “태양계에서 가장 큰 덩치에, 자기장으로 충만하며 삼백년이 넘도록 폭풍이 그치지 않는 행성.” 목성은 모래색 피부의 덩치 큰 근육질 제우스가 아니라 달팽이였다.

 

목성은 달팽이 껍질처럼 생겼음에도 머리는커녕 더듬이 한번 내민 적이 없었고, 태양계를 자유로이 횡단하지도 않았으므로. 망원경에 눈을 댄 손님들은 실망했다. 이소는 그런 손님을 볼 때마다 안타까워했다.

 

다보탑을 볼 줄 알았는데, 십 원짜리 뒷면을 본 거야. 다들 최소한 달걀만 한 목성을 상상하고 렌즈에 눈을 들이밀 텐데.”

 

목성이 달걀만 하더라도 거기서 병아리가 태어나기는커녕, 부리도 내밀지 않겠지만. 손님들이 만족할 거란 그녀의 생각은 설득력 있었다. 달에 초점을 맞춘 다른 망원경으로는 딱 달걀만 한 달을 볼 수 있었는데, 이를 본 손님들은 모두 나름대로 만족했다. 아무리 봐도 토끼나 두꺼비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달걀이 모든 걸 결정한다.’

 

그녀는 이 문장을 천문대 일지 첫 문장으로 뽑았다. ‘삶은 달걀이 모든 걸 결정한다.’와 경합한 결과였다. 나는 뽑히지 않은 문장을 지지했다. 단순히 두 가지 방법으로 읽을 수 있어서였다. 그중 달걀이 삶의 모든 걸 결정한다는 식으로 읽는 게 좋았다.

 

삶은 달걀이 모든 걸 결정한다.’

 

달걀의 결정인지 그녀의 결정인지 모르겠으나, 그녀의 선택은 변하지 않았다. 보조관측실을 정리하며 그녀를 설득했지만 그녀는 완고했다. 대신 그녀는 내가 원하는 문장을 첫 문장의 각주로 달아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첫 문장은 장난스러운 모양이 되었다. 내가 그렇게 써도 되냐고 묻자 그녀는 어차피 최근엔 이걸 보는 사람도 없다고 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주웠다. 누군가의 분실물이었다. 그녀는 휴대폰과 일지를 사무실에 두고 갈 테니 먼저 주차장에 가 있으라 일렀다. 나는 보조관측실과 이어진 주관측실을 마지막으로 살폈다. 불을 끄고 나가려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들짐승이 내쉬는 숨소리 같았다. 가끔 창문으로 날짐승이 들어온 적은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소리는 구석에 쌓인 보조 기제 뒤편에서 들려왔다. 그곳에는 웬 중년이 벽에 기댄 채 자고 있었다. 그 좁은 곳에서 몸을 뒤척이기라도 했는지 자세는 정말 들짐승 같았다. 나는 그의 무릎을 흔들며 그를 깨웠다. 그는 힘겹게 눈을 뜨더니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여으기가 어디죠?”

 

그의 발음이 꼬였다. 그의 입에서 옅은 술 냄새가 났다.

 

천문대에요. 왜 여기 계세요?”

 

나는 그의 팔을 당겨 일으켜 세웠다. 그는 다리에 쥐가 났는지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죄송합니다……

 

나는 이소에게 전화해 이 일을 알렸다. 그는 계단을 내려가며 연신 사과했다. 나중에는 휴대폰을 잃어버린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일층 정문을 나와 주차장으로 가자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주웠던 휴대폰을 보여주자 그가 고맙다며 받았다. 그는 아직 취기가 덜 가신 듯했다. 그는 우리가 묻기도 전에 자신이 왜 주관측실에서 자고 있었는지 설명했다. 나름의 변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취한 그가 보기에 별이 너무나 아름다웠으며, 대형 망원경으로 다른 행성을 못 보는 게 너무나 아쉬웠다고 했다. 그는 이에 어쩐지 분노까지 느꼈는데. 취객의 분노는 늘 그렇듯 기행으로 이어졌다. 여기까지 말하진 않았지만, 그는 우리가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형 망원경으로 다른 행성을 보려 한 듯했다.

 

혹시 오늘 봤던 목성이 달걀만 했더라도 그랬을까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곧장 답하지 못했다. 행성을 조금 더 크게 보기 위해 잠복까지 한 것 치고는 긴 고민이었다. 우리는 은근히 그가 당연히 그랬을 거라 답하길 기대했다.

 

 

 

1994년 인천 출생

부지런해지고 싶은 휴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