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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제'라는 이름_구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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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622회 작성일 19-08-01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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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제’라는 이름

 

구설희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정장치마를 입고 머릴 틀어 올리고, 동그란 얼굴에 이마를 드러낸 그녀가 한 손엔 서류를 한 손엔 가방을 멨다. 정확히 말하면 한 손엔 면접 제출 서류를, 한 손엔 가방을. 단정하게 옷을 입은 청년도 바삐 걸음을 움직였다. 넋 놓고 바라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나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전 11시, 기간제 근로자직 면접장. 하반기 6개월 동안 일하는 일자리에 한 곳엔 12-14명이 왔고 다른 곳에는 서른 명 정도가 면접을 보러왔다.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저 사람이 뽑힐지, 아니면 내가 뽑힐지, 재며 서로를 훑었다. 인상적이지 않은 사람, 옷을 수수하게 입은 사람,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FM의 정장을 입고 온 사람. 그리고 그녀도. 훑고 훑는다, 타인을, 오늘 내 모습을. 책상 위에 놓인 면접자의 이름표 중에서 내 이름표를 찾아 가슴 위에 달았다. 

 

  이름표를 찾는 일은 내가 밥벌이할 자리, 일할 자리를 찾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00사원, 00부서 등의 명명을 찾는 일이다. 하지만 탈락 된다면 그 이름표들은 모두 쓰레기 통으로 갈 것이고 하나의 이름표만 책상 위에 놓일 권리, 사회적 자리를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이름표들은 무얼 하며, 어디로 가야 하나. 아마도 취업 준비생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구인란을 뒤적이는 지루한 세월을 또 보내야 할 것이다. 그녀는 뽑혔을까. 그녀는 이름표를 갖게 되었을까.   

 

  그렇게 이름 없는 세월을 보내고도 여기 기간제 근로자직은 고작 6개월의 생명을 얻는다.  6개월 동안 이름을 가지게 되는 유한한 삶. 지금의 기간제 근로자는 피치 못할 이유로 뽑는 게 아니라, 다만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 뽑는 것 같다. 적어도 내가 겪은 곳에는 그랬다. 퇴직금이나 수당을 주지 않아도 되니까. 밥벌이의 유한함은 불안감을 가져온다. 계약이 끝날 시기에 다시 또 어디서 일자리를 구할지, 평범한 일상이 가능할 지, 내 이름표가 이제 영영 주어지지 않는 건 아닌지 걱정한다. ‘기간제 근로자’라는 말만 들어도 가난과 불안이 연상된다. 이 체계가 말하는 건, ‘개인인 너의 삶 보다는 체제의 효율성, 돈이 중요하다.’는 것. “그들에게 도시는 야생이었다.” 바꿔 말하면 우리에게 취업은 야생이다. 생존만을 걱정해야 하는 곳에서 어떤 삶과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리베카 솔닛은 우리 각자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다른 이야기를 쓸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서사를 만들어갈 수도 있고, 정치적으로 거대서사를 만듦으로써 다른 이야기를 쓸 수도 있다. 우리는 안정된 삶을 꿈꾸며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일구어 나가고 싶어 하며 주체적으로 이야기를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유한한 삶이 나를 지탱하고 있을 때, 이름표 없는 삶을 살아 갈 때 이야기 쓰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더 이상 계약직이나 기간제 근로자로 일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내 이야기를 쓰고 싶고, 이름표를 갖고 싶다. 

 

  리베카 솔닛은 또한 이런 체제, 불합리한 것을 막아줄 사회는 공동체와 연대 즉 시민사회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그 시민사회에서 중요한 일은 “언제나,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이며 “‘이야기들의 싸움’”-“스스로 이야기를 짓고, 기억하고, 다시 들려주고, 기념하는 것은 우리 일의 일부다.”라고 말한다. 각자가 각자의,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짓고 들려주고, 기억하는 이야기들의 싸움. 그리고 그 이야기가 거대 서사에 영향을 줄 수 있도록 하는 싸움.

 

  이야기들의 전쟁이란 결국 이름표 없는 사람들의 이름표 얻기의 싸움이랄 수 있다. 나의 이름표와 그녀의 이름표. 누가 자리를 얻었든, 탈락이 되었든. 어딘가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 사회적 자리의 이름표에서 탈락되었을지언정, 다시 그 이름표로 다른 연대와 공간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 그래서 나는 누군가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다. 당신은 이름표를 결국 얻었는지. 혹은 이름표에서 탈락했는지. 어느 쪽이든 듣고 싶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인가? 탈락의 이름은 무엇인가?

 

 

 

*리베카 솔닛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