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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 필리버스터를 듣는 밤_정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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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7-17 16:44 조회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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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

필리버스터를 듣는 밤

 

 

정재운

 

 

 

  “이럴 거면 결혼 같은 거 하지 말어!”

  안 그래도 욱신거리던 등짝에 민정의 새된 목소리가 날아와 박힌다. 푹 고개가 떨어졌다. 풀린 줄도 몰랐던 운동화 끈이 얼마나 씹혔던지 끝이 망가져 있다. 걸음을 멈추자, 봄밤의 서늘함에 오소소 몸이 떨린다. 급기야 그녀는 빼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내가 몸을 홱 돌리자, 움찔 움츠러든다. 좀 그러질 말어, 점잖게 재우치며 달랠 수밖에. 우리는 그렇게 해 떨어진 낯선 중국인 거리를 통과했다.

  “편의점 도시락이라도 사 먹어요.”

  그러마, 하고 그녀를 버스에 태워 보냈다. 급하게 호흡기를 찾는 천식환자처럼 그제야 생각난 듯 주머니를 더듬어 담배를 문다. 구도심의 거리를 미끄러지듯 지치고 또 지쳐서 자취방으로 향한다. 그 길에 잠시 슈퍼엘 들른다. 주머니에서 구백 원짜리 막걸리 두 통의 값을 치를 동전을 센다. 주인은 손바닥에 동전을 펼치고 눈으로도 세고, 입으로도 센다. 노인네, 한참 센다. 그를 두고, 문 너머 인쇄골목의 초입으로 눈을 둔다. 아직은 내 보금자리인 낡은 빌딩 옥탑이 보인다. 달달 떨리는 손으로부터 막걸리가 든 검은 비닐을 받아 쥐고 문을 열고나오며 드는 생각이, 망할 이놈의 동네엔 온통 오래된 것들뿐이구먼, 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생기하는 낭만이, 유난한 시간여행의 장소일지 모르지만, 거주민에겐 오롯이 박제된 현재일 따름이다. 한 달 후면 또 어디론가 이사하게 될 것이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내내 막걸리 병이 툭툭 다리를 때린다.

  궁둥이를 앉혀 운동화를 벗자, 땀에 전 뻣뻣한 양말이 나온다. 쿠린내가 코를 찌른다. 양말을 벗기고, 쪼글쪼글하게 불은 흰 발바닥을 내려 보다 결심한 듯 이내 주무르기 시작한다. 반으로 접힌 이불을 펼치고 앉아 막걸리를 딴다. 첫 모급은 급하게, 페트병에 빈 공간이 마련되자 흔들어 부유물을 섞는다. 가만, 쿠린내가 손바닥에도 뱄나두 번째 입을 갔다 댈 때는 보다 천천히 마신다. 담배 생각이 나지만, 그때마다 두어 번씩은 참기로 했다. 무시로 이는 흡연욕을 다 충족시키다간 감당이 안 될 것이다. 한 달 후부턴 여자란 족속과 같이 살아야 할 텐데, 버릇을 들여놔야지그렇게 막걸리 한 병을 다 비우는 동안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다. 요 근래 모든 날들이 그랬다. 궁둥이를 떼 창을 열고 담배를 한 대 피우고야 뭔가 생각이란 것도 할 수가 있었다.

  ‘넌 여기 왜 있니?’

  알 수 없는 건, 영원히 알 수가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서랍 속에 들어있는 양반김의 출처처럼. 부엌까지 가기도 귀찮다. 아침부터 해 떨어질 때까지, 우리는 아홉 집을 보았다. 중간에 김밥 한 줄 먹은 게 전부였다. 자가용이 없는 우리는 서로의 직장 생활을 위해 지하철 노선을 따라 집을 구해야했다. 새벽 같이 일어나선 각자 빼곡하게 메모해둔 집주인과 공인중개사로 연락을 취해 스케줄을 짰다. 언제나 주장하기로, 나는 조건만 맞으면 주택이라도 마다하지 않았으나, 민정은 고집스럽게 아파트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근거를 요약하면, 분리수거 배출이 쉽다는 것과 안전, 여름겨울을 나기 수월하다는 세 가지였다.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애초에 공감할 수가 없는 것인지 몰랐다. 결정적으로 내가 아파트 입주에 반감을 가지게 된 건 관리비 때문이었다. 또래보다 이재에 어두운 내 눈엔 매달 부과되는 그 돈이 꼬박 월세처럼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접점이라 여기고 빌라를 몇 군데 보러 다닌 것이었는데, 왜 울고 지랄을 떠느냔 말이다. 짭짤한 김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알 수가 없는 건

  “이렇게 자유롭게 토론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국민으로부터 폭력의원이라고 낙인찍히지 않았을 텐데……

  두 병째도 다 비워간다. 야당의 한 국회의원이 의사발언대에서 뒤돌아 눈물을 훔쳤다. 오늘도 필리버스터는 이어지고 있었다. 며칠 째인지, 세다가 헷갈린다. 다시 손가락을 접으며 센다. 어쨌든 오늘 돌아다닌 집 개수보다는 작은 듯싶다. 중국인거리에 있던 어떤 빌라였다. 해가 다 졌지만, 민정은 한 군데만 더 보자고 보챘다. 신혼부부가 살던 집이라 믿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나야 터무니없이 높은 융자가 낀 집만 아니라면, 사실 오케이였다. 1층이라 볕이 잘 들어올까 싶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다고 생각도 않았고, 저녁이라 확인할 수도 없었다. 남자가 문을 열어 우릴 맞았다. 현관에서 여자가 앉아 있는 식탁이 눈에 들어왔다. 무말랭이, 가지나물, 햄구이, 시락국이 올라있는 식탁이었다. 들어서길 저어하는 민정을 부부가 손짓했다. 집은 아담하고 깨끗했다. 물줄기도 거침없었고, 무엇보다 귀한 전셋집이었다. 지친 내가 연신 고개만 끄덕이는 사이, 민정이 그때까지 우리가 보지 못한 방에 대해 물었다. 남자가 조용히 부엌 서랍에서 열쇠를 들고 다가갔다. 방문이 열리자, 민정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으며 급하게 양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남자와 민정의 뒤에서 까치발을 들었다. 아기침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방 한쪽 구석으로 기저귀와 장난감을 비롯한 각종 유아용품들이 소담스레 쌓여있었다. 민정이 몸을 돌려 부부에게 사과했다. 영문을 모르는 나도 덩달아 허리를 숙여 사과를 하고는 몸을 돌려 집을 나왔다. 우리는 골목 입구까지 나와선 한참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그때, 남자가 담배를 태우기 위해 집밖으로 나왔다. 그의 입가가 객쩍은 미소로 떨렸다.

  “두 번째에요.”

  멀찍이 흩어지는 담배연기를 좇으며 그가 말했다. 그들은 뱃속의 아기를 품고 늦은 결혼식을 올렸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유산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일 년 후, 다시 아이를 가졌으나 태중의 아이는 또 죽고 말았다. 그들은 계약이 아직 남았으나, 친정엄마 곁인 경남 어디 시골로 이사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계획대로 꼭나는 얼버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종일 고갯짓을 참 많이도 했다. 곤한 고개를 누이기 위해선 막걸리 두 병에, 담배 두 대면 충분하다. 휴대전화 속 국회의원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는 다음 주자에게 발언대를 넘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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