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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들이 흐르고_김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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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667회 작성일 19-07-14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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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들이 흐르고   

 

 

 

 

 또 에어컨이 켜져 있다. 며칠 사이 두 번째다.

 책들은 밤새 시원했겠구나. 그러면 되었다는 생각이, 전기세 걱정할 새도 없이 떠오른다. 한낮 같은 아침볕을 등에 지고 걸어오느라, 뜨겁게 부푼 나도 바로 시원해졌다. 지난 겨울에도 그랬었다. 깜빡하고 난방기를 끄고 가지 않은 날이 여러 번 있었다. 책들이 반기는 인사처럼 달려드는 온기에 그 때도, 그만 안심하고 말았다. 책도 따뜻하고 나도 따뜻했던 겨울 아침. 그러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책방 이층에 사는 할머니가 밤새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여러 번 꾸중을 하셨지만 말이다. 지금 이 곳은 그런 꾸중조차 없다. 밤새 켜둔 에어컨의 냉기에 혼자 놀라고 혼자 안심하고 있는 중이다. 책도 시원하고 나도 시원한 여름 아침.

 

 적절한 각도로 자리 잡은 조명을 켜면 책방은 비로소 열린다.

 음악을 켜고 바닥을 쓸고 닦는다. 잠깐의 노동이 스쳐간다. 작은 공간에서 나의 움직임은 작고, 그 시간은 아주 적다. 그래서 다행이다. 혼자 일하기에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노동. 그것은 매대 위에 있는 책의 먼지를 털어내는 일로 이어진다. 딱 하루 동안의 먼지가 가볍게 쌓여 있다. 손으로 털어내도 될 정도의 양. 그 하루만큼의 먼지를 닦아내다 보면 정지된 듯한 책방 속에서 흐르는 시간이 느껴진다. 일시 정지된 풍경, 시간도 잠시 멈칫하는 순간. 시간이 흐르다가 책방에 정박해버린 고요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고 있다. 책들이 나와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책 먼지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오후 빛이 길게 들어오면 몇 시간 지났구나하는 감각.

 모이고 흩어지는 먼지와 들어오고 빠지는 빛의 쓸모로 책방은 시간 없이 흐른다.

 

 고이면서 흐르는 시간 속으로 먼지를 털어내면 책방의 일이 시작된다.

 책장에서 튀어나오거나 쑥 들어간 책들을 가지런히 하고, 매대 위의 책을 다시 정리하고,  위치를 변경하기도 한다. 도무지 팔리지 않는 책들을 살피고 입고하자마자 팔린 책을 살핀다. 책이 팔리고 그래서 생긴 틈으로 책이 기울어져 있는 칸이 어디인지, 꿈쩍도 않는 책이 있는 칸은 어디인지를 가늠한다. 인터넷으로 신간 목록을 훑고 필요한 책을 메모한다. 늘 그득히 쌓여 있는 주문 목록을 보며 고민하고 갈등한다. 그리고 주문 도서들의 배송 상태를 확인한다. 오늘 오후면 도착하겠구나, 며칠 걸리겠구나. 그러다 보면 택배 아저씨의 장난기 묻은 말투가 생각나 슬몃 웃기도 한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일을 하다 보면 첫 손님이 문을 연다. 첫 손님이 오는 날은 책을 사지 않아도 다행이라 여긴다. 어느 날은 혼자 책에 묻혀 있다가 하루를 보내기도 하니 말이다. (이웃 책방 주인은 이런 날들을 ‘책방 고독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 말은 책방을 지칭하는 건지, 책방 주인을 지칭하는 건지 모호하지만. 아마도 둘 다이지 않을까.)

 

 책이 들고 나고, 사람이 들고 나는 책방의 문.

 그 열리고 닫히는 문을 보다, 책을 보다, 창밖을 물끄러미 보기도 하는 늘 같은 하루. 그러다 지치면 강물 위로 대책 없이 뛰어오르는 물고기처럼 책방 바깥으로 탈출한다. 간단한 메모 한 장 붙여놓고선. 그런 날이 많지 않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날, 책방을 나서면 이웃 책방 주인들을 마주치기도 한다. 물 밖으로 대책 없이 튀어나온 사람들. 같이 숨 한 번 쉰다. 동네 한 바퀴 돌고 책방으로 회귀하는 순간, 책방의 일은 다시 시작된다. 그것은 책을 들이고 팔고, 청소를 하고, 손님을 맞는 것이 아니다. 책방의 일이란 무엇일까. 책 그늘 속에서 내 그림자를 숨기며 지내는 시간 속에서. 그것은 책을 접촉하는 일보다 불안과 안심을 내색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또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라기보다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