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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 그리운 언니에게_정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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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9-07-04 12:54 조회8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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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

그리운 언니에게

 

정재운

 

 

  언니,

  그리운 언니에게, 라고 써놓고 한참 들여다보다 그립다라는 말을 지워버렸어요. 내 마음 속에 언니를 향한 그리움이 없어 그런 건 아니에요. 가만가만히 만져지는 거리감이랄까, 그런 게 싫었어요. , 그립다고 말하면 언니와 내가 어마무시하게 멀리 떨어져 있어야할 것 같지 않나요? 만약 언니도 그런 기분이 든다면, 아무리 고심해서 고른 말이라도 진작 치워놔야지요. 우리의 살가운 이바구를 위해서 말이어요. 그럼 언니, 나 편히 얘기해요.

  신랑이요? 진작 나가고 영이랑 둘만 있어요. 영이는 등에 업힌 채 숨을 색색거리면서 잠들었어요. 우리 어른들하곤 다르게 영이에겐 낮과 밤의 경계가 또렷하지 않나 봐요. 배통이 아직 작아서 그런지 통잠을 자질 않고 자꾸 깨요. 시어머니가 자주 입에 굴리는 말처럼 새들하고 애기는 밤에는 자야지,”하고 흉내내보지만, 그게 말 그대로 흉내일 따름이란 걸 아는지 내 말은 씨알도 안 먹혀요. 그러곤 해 뜬 세상에 새들이 낱알을 쪼거나 집을 지을 시간에 우리 영이는 잠들곤 하네요. 아휴, 말도 마셔요. 제가 이렇게 앉아서 글을 쓰는 동안, 얌전히 눈만 끔뻑이고 있을 리 없어요. 지금 이렇게 악필로나마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영이가 잠에 빠져도 한참 빠져있기 때문이에요.

  입이 방정인지, 우리 영이가 유명한 건지, 갑자기 빼하고 울기 시작하더라고요. 한참 달래서 겨우 재웠어요. 온몸이 진땀으로 젖었어요. 언니도 나와 같은 체질이어서 알겠지만, 출산 전에는 어디 땀 한 방울 흘린 적 없었잖아요. , 학창시절 보면 체력장이라는 게 있거든요. 그때도 아무리 매달리고 뛰어도 벌겋게 열만 오르지, 땀이란 걸 모르고 살았어요. 이렇게 체질이 변하다니놀랍기도 하고, 조금은 무섭기도 해요. 창을 열어 이월 초의 차가운 바람을 실컷 맞고 싶지만, 영이 생각하면 그래선 안 되겠죠. 시어머니가 봤다면 영이도 영이지만, 내 등짝부터 때렸을 거예요. 찬바람 들면 큰일난다나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라고 택수 씨 얘기도 잠깐 할게요. 오늘 아침 일이었죠. 구두를 꿰신다말고 갑자기 안방으로 들어온 그가 구들의 온도를 한참 올려놓는 거예요. 밤도 지나고 당신도 없는데 왜 그러냐 했더니, 춥게 있으면 큰일 난다는 거지. 이상하게 그 말이 기분 나쁜 거 아니겠어요. 왜냐구요? 제 말 좀 더 들어보세요. 함께 살았던 지난 몇 해간 봐온 그를 떠올리면 낯설어도 너무 낯선 모습이 아니냐 말이어요. 한겨울에도 두꺼운 솜이불과 코르텐이면 거뜬하다며, 연탄 줄 일이 이렇게 없냐며 흰소리나 하던 그가 이리 변한 건 다 제 새끼 위하는 마음이 아니냐고요. 그렇게 막 대거리 아닌 대거리를 하고 있는데, 입꼬리를 길게 찢으며 웃는 양반이 절 꼭 안아주는 게 아니겠어요? 아침부터 화를 당하면 종일 재수가 없다며 흰자가 튀어나올 만큼 부릅떠도 뜰 양반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이러는 거 있죠. 당신, 춥게 있지 마.

  춥게 있지 말랬으니, 말 들어야죠. 남자들은 자기 말이 맞건 틀리건 일단 따라줘야 마음이 흐물흐물해진다는 걸 이젠 알거든요. 첨엔 그것도 모르고 죄 내 뜻대로 했죠. 결과적으로 내 말이 맞는 걸로 판명 났어도 얼마나 불퉁한지, 그러면 또 왜 불퉁하냐며 따져 묻게 되는데, 부부싸움의 팔구십은 꼭 그렇게 나는 거더라고요. 해서 택수 씨가 하자는 대로 하니 싸울 일이 없어졌어요. 그의 주장을 따라 결과가 옳으면 옳아서 좋은 거고, 틀리면 내가 교정해줄 수 있는 역할이 생겨서 좋고, 그럼으로 남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니까 또 좋고 말이에요. 물론 끝끝내 동의할 수 없는 구석도 생기기 마련이죠.

  바로 어제였어요. 제가 모유양이 워낙 작다 보니, 분유를 두세 번 먹이고야 젖 한 번 겨우 물리는 식인데, 택수 씨가 품에 안겨 젖병을 빨고 있는 영이를 내려 보며 갑자기 눈물을 훔치는 거예요. 너무도 평온한 보통의 일요일 오후에 저 남자가 왜 이래, 하는 생각이 들자 짜증이 밀려오는 거예요. 분유값이 걱정돼 사내가 눈물을 짓냐, 아니면 지 새끼 모유 못 먹여서 그러나 말이죠. 누구보다 속상한 건 나다, 빈 젖 물리면 우는 걸 어쩌냐 말예요. 언니에게 편지를 써야 겠다 생각을 했던 건 간밤에 영이를 재우고 들었던 그의 귓속말 때문이었어요. 전쟁을 떠올렸다지 뭐예요. , 폭탄이 터지고 총구에서 불을 뿜는 그 전쟁 말이에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내가 알기로 그는 방위 출신이거든요. 이 똥방위가 글쎄, 참으로 구체적이게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기를 두고 나치에 끌려가는 유대인 아버지를 상상했다지 뭐예요. 언니,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 더 얘기해줄까요? 영이 낳을 때 말이에요. 꼬박 이틀을 꼼짝없이 진통에 묶인 채 허리도 틀어보고 뭣도 다 해봤지만, 끝내 개복수술을 했더랬죠. 택수 씨는 그때도 밖에서 엉뚱한 상상에 골몰했다고 해요. 이대로 영영 나를 잃게 되는 장면이었다는데, 아니 대체 그런 것이 아비 될 작자가, 남의 편이라 남편이라는 인간이 할 만한 생각인가요? 무릎을 꿇고 치성을 드려도 모자랄 판에 왜 그 따위 최악을 떠올리느냐 말이어요.

  말하다보니 영 열이 뻗치며 또 땀이 삐질 났어요. 택수 씨는 그때 기억들을 새삼 꺼내며 귓속말을 이어갔지요. 말주변 없는 제가 요하자면 이런 것예요. 당신 자신의 오늘이, 이전까지 거머쥔 적 없었던 행복들이 실감이 나질 않아서 종종 최악을 떠올렸다, 그것은 자신의 행복을 실감하기 위한 이기적 상상력이 아니라 그렇게 일시적으로나마 고통 속에서 윤리를 자각하려는 몸부림이다, ‘더할 나위 없다는 오만은 공감을 뭉툭하게 만들고, 잊지 말아야하는 것을 잊게 한다지 뭐예요. 그의 말을 질긴 풀처럼 한참 되새기다 물었어요. 잊지 말아야하는 것이 무어냐고, 그러니 답하더군요. 가깝게는 부모형제에 대한 마음, 조금 멀리는 이 나라(그이는 분단된 조국이라고 했지요), 보다 멀리까지 내다보면 세계평화라는 겁니다.

  그리운 언니,

  세계평화까지 나온 마당에 언니와 나 사이의 거리가 멀면 얼마나 멀다고 그립다는 표현을 포기하고 말았던 걸까요. 그립다고 말할래요. 그리운 언니, 당신과 나의 거리는 가찹다면 또 얼마나 가차우냔 말이어요. 생명 속에서 뭇 생명들은 섬과 섬처럼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지만, 생과 사는 얼마나 바투 붙어있는지요. 언니가 가시고, 영이가 났다면 동일한 총합의 세계에서 생과 사는 두 몸처럼 떨어져있는 한 몸이에요. 영이가 또 우는 걸 보니 꽤 오래 앉아있었나 봅니다. 언니, 이만 씁니다.

일천구백팔십칠년 이월 이일

쌍둥이 동생 박미영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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