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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맡겨!_박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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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597회 작성일 19-06-24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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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맡겨!

 

유럽의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다고들 한다. 한반도보다 북위가 높고 일조량이 적어, 날이 좋으면 사람들이 해를 쬐러 나온다지 않는가. 정말 운이 좋게도, 나는 첫 날부터 쾌청한 날씨에 돌아다녔다. 낮 동안 대체로 기온도 온난한 나날이 이어졌었다.

‘아니, 뭐라고? 잠깐만. 이거 뭐야?’

가장 기대했던 네덜란드 일정을 앞두고, 갑작스레 기온이 떨어지고 일주일 내내 비 소식이 이어지기 전까지..

 

 

순식간에 기분이 지난주의 깜깜하고 춥고 척척한 빗속으로 내던져졌다.

프라하에서 어느 날이었다. 늦은 오후의 비 소식을 확인했던 터라, 일찍 귀가하려고 애를 썼더랬다. 그럼에도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섰을 즈음에는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점점 굵어졌고, 하차할 때는 해도 저물어 한 치 앞도 안 보였다. 지난 며칠을 가뿐하게 다닌 길이 무서워졌다. 운동화가 순식간에 물에 젖고 바짓단이 살갗에 차고 무겁게 달라붙었다. 우비 단추 사이로도 물이 새고 있었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온 몸이 탈수 전의 젖은 빨래가 되어 있었다. '가볍게 살짝 쏟아지고 금방 그친다.'던 유럽의 비가 이런 거였다니! 막연하던 '샤워'라는 단어의 진면목을 체험하고 질색을 했다. 다음 날은 거짓말처럼 해가 나서 멍청하게도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그런 비가 일주일 내내 오면, 그건 샤워가 아니라 장마잖아?’

 

설레는 마음으로 읽었던 여행서에 사기 당한 기분이었다. 분명 변덕스런 날씨에 대한 경고도 있었지만, 바람막이 정도를 권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발랄하고 통통 튀는 네덜란드에 대한 안내가 내 기대를 부추겼던 것이다. 우중충한 하늘만큼 가라앉은 내게, 현지인 숙소 주인은 생각보다 별 거 아닐 수도 있다며 그냥 나가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프라하는 한참 내륙이니까, 네덜란드는 다른 비가 내릴 지도 몰라. 게다가, 내가 네덜란드를 언제 다시 올 지도 모르고. 몇 년 후에 온난화 때문에 가라앉아 버리면 영영 기회는 오지 않을 수도 있잖아!’

 

여전히 긴장은 가득했지만, 적어도 당장 눈앞의 보슬비는 만만해 보였다. 바람막이만 단단히 여미고, 가방에 챙긴 우비와 우산을 부적 삼았다.

 

놀랍게도 그 하루는 알차게 흘러갔다. 소담한 박물관은 기대 이상이어서 두 번을 돌았고, 우연히 들어선 골목에는 예쁜 가게가 늘어서 있었다. 비는 계속 내렸다. 분무기 물처럼 가늘고 무해하게! 오후 한 시가 다 되도록, 우비도 우산도 활약할 기회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약 올리기라도 하듯 해가 살짝 비치기도 했다. 슬금슬금 설렘이 돌아오고, 포기하고 있던 반나절짜리 투어가 아쉬워졌다. 예약 해 두지 않아서 초조한 마음으로 대행사를 들어섰는데, 두시 반에 출발하는 당일 투어에 나를 위한 자리가 남아 있었다. 시간 맞춰 움직이기 위해 정류장을 향해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다소 무거워졌지만, 살을 때리는 무게도 아니었다. 괜찮을 거라고, 마음에 펌프질을 더했다.

 

‘괜찮지 않아!’

 

투어가 이어질수록 실망이 쌓이고 있었다. 짧은 시간만 할애한 방문지에서 자꾸만 무언가 사라고 종용받는 기분이었다. 날씨도 계속 좋지 않아 조금씩 옷이 젖고 추위가 들기 시작했다. 섬마을을 방문하기 위해 페리를 기다리면서, 나는 예쁜 호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설프고 얇은 햇살이 호수 저편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다. 누구 약 올리나?

삼십 분짜리 페리 안에서 서버가 돌아다녔다.

 

‘방금 밥 먹고 와플 먹고, 또 뭔가를 먹으라는 거야?’

 

괜한 오기에 가이드가 지정한 곳을 피해서 요기했다. 시식용 와플과 치즈를 실컷 집어 먹었다. 근거 모를 화가 쌓이고 있었다. 지나가는 서버를 붙들었다.

 

“하이네켄 하나요!”

 

본고장에서 어쩐지 훨씬 신선한 것 같은 맥주 한 병을 비웠다. 페리가 목적지에 가까워지면서 한 쪽 볼이 유난히 뜨끈해졌다.

해가 난 것이다!

 

섬마을은 작고 평화롭고 예뻤다. 까맣게 윤이 나는 나무 집이 늘어섰다. 독특하고 진한 올리브색 지붕이 저마다 조화롭게 드리웠다. 귀여운 나무 장식이나 새장, 티 테이블 따위를 숨긴 정원이 몹시 흥미로웠다. 낮게 나는 새 무리가 몇 번이고 머리 위를 선회했다. 방목 되는 양들도 귀여웠다. 짧은 산책동안 구석구석의 사진을 실컷 찍었다. 산뜻한 기분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 적당한 피로감으로 달게 졸았다.

 

열한 시가 다 되어 귀가하는데, 숙소 주인이 어떻게 보냈느냐 물으며 반겼다. 가장 중요한 섬마을의 아름다움과, 꽉 채워 보낸 내 하루를 정신없이 쏟아냈다. 아침에 쫓아 내 줘서 고맙다는 감사 인사에 멋진 윙크를 돌려 받았다.

 

“나도 여행을 자주 다녀서 알아요. 날씨 사정이 좋지 않으면 속상하죠. 그렇지만 일단 나가면 놀라운 경험들이 기다리니까, 무조건 나가야죠!”

 

문득 프라하에서 만난 여행자의 우스갯소리가 떠올랐다.

 

'유럽에 좋고 나쁜 날씨 따위는 없어. 부적절한 복장만 있을 뿐이지!‘

 

나는 해가 나서 들떴던 걸까, 아니면 섬마을이 정말로 무지개만큼 예뻤을까? 그것도 아니면 혈중 알콜의 힘이 굉장히 좋았던 걸까? 어쩌면 ‘유럽 여행자’에게도 좋고 나쁜 날씨는 없을 지도 모른다. 부적절한 마음가짐만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