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빨

  • 자료실
  • 글빨

내게 기형도_이기록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1,951회 작성일 18-10-04 15:50

본문

글빨 18.10.04 에세이

내게 기형도

이기록

 

 

그해, 그를 놓치고 한동안 헤매었다. 간혹 길거리에 앉아 울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슬프지는 않았지만 그저 그런 날들이었다. 이제 돌아온 자리에서 손바닥 위로 가지들이 돋고 있다. 아주 개인적인 고백이었다.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1)

 

대학 시절, 기형도 시인에게 빠져있었다. 그의 시는 우울했고 내게서 나오던 말들도 우울했다. 누군가 물어왔다. 대답했다. 좋아하는데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단지 우울을 사랑할 뿐이라고 대답했다. 어차피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우울했다. 관계는 이어졌고 글을 썼지만 다리의 힘줄이 당기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난 걸을 수 없었다.

정신적 피폐함이 나를 구원하리라 생각하기도 했다. 억지스러운 순간들이었다. 그 순간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자 다시 찾아올 태풍처럼 메워지지 않는 단어들이 나뒹굴었다. 서로 한 쌍이 아닌 것들이 한 쌍이 되기 위해 입을 맞췄다. 아마 취했던 모양이다.

남겨둔 것들은 싸늘했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2)

 

그때 내가 세상에 대해 가졌던 감정들은 한쪽으로 치우쳤다. 혼자서 퇴화하는 듯 싶었다. 힘겹다 생각한 적은 없었으나 매번 힘겨웠다. 쓰는 자로서의 입장보다는 읽는 자로서의 입장을 가졌다. 많은 시간을 영광도서나 지금은 사라진 동보서적에서 시간을 보냈다. 세상에는 잘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난 매번 모자랐고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생겨났다.

그때의 나에게 물었던 질문들은 낯설었다. 스스로의 결핍을 마주하기에는 여름이 너무 일찍 끝났다. 글은 매번 글이라는 한계를 지녔고 유령처럼 떠돌았다.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바다는 멀리 있기에 바다였다.

때가 되었고 글을 쓰기보다는 생활을 유지해야 했다. ‘생활은 전단지처럼 흔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3)

 

일상은 습관이 되었다. 그 안에서 틈틈 글을 쓰려고 했으나 쓰나마나한 언어들이 이어졌고 어느 순간 난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매몰되고 있었다. 집중하지 못했고 잊어간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뒤늦게 가출한 후배가 집 근처로 이사를 와서 자주 술을 마셨다. 후배의 글들은 피어나는 중이었다. 하지만 내겐 다른 시간의 어둠이었다. 듣고 있는 동안 들은 것들은 사라지지 않았고 변명들이 늘었다. 허공에 오래 머물기 위해 영혼이 거세당한 듯 했다. 명료했다.

대체가능한 것이란 있지 않았다. 취기(醉氣)로 인해 사는 듯 했다. 부서져서 안 되는 것들이 부서졌다. 걸레를 들고 책상을 닦았다. 잊어버린 것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대답하기보다 질문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일 거다. 그걸 알기까지 시간은 여전히 시간다웠다.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4)

 

오랜 시간 아무 것도 쓰지 않고 지나왔다. 쓰지 않는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린 듯 내게 삶은 유지하는 거였다. 순간은 아무 의심 없이 찾아왔다. 할 수 없다고 여겼으나 받아들였다. 그리고 달라지는 것들이 생겼다. 후배들과 모임을 만들어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다시 쓰기 시작하자 부끄러웠다. 다시 필사를 하고 품평을 하고 간간이 취했다. 취하는 법을 다시 배웠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갈 쯤 조금은 부끄러움을 덜어낼 수 있게 되었다.

다시 글을 쓰며 무엇을 쓸지 고민하고 있다. 뜨겁게 냉정해지는 법을 알아가는 중이다.

 

바라보던 대상들이 말을 걸어오는 시점이 있다. 난 표류하는 대상들과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기억하고자 하는 것과 대화하는 일들은 매우 유익한 일이다. 이때 내가 할 일은 빈약한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낮과 밤의 모든 것들로부터 대화를 지속하려 노력할 뿐인 것이다.

 

 

- 1)~4)는 기형도의 시 바람은 그대 쪽으로’, ‘빈집’, ‘입 속의 검은 잎’,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에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