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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예정 지구를 가다_이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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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조회2,138회 작성일 18-08-23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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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빨18.08.23 에세이

철거 예정 지구를 가다

이기록

 

 

차를 타고 가다보니 도시 곳곳에서 건물을 헐고 다시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이 눈에 보인다. 단층이나 2, 3층 건물을 헐고 아파트 단지나 주상복합단지를 만드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별 생각 없이 돌아오던 길, 집 근처에서도 아파트를 짓기 위해 주택 단지를 허물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곳은 내가 학창 시절 학교와 가까워 친구들과 많이 지나다니던 곳이다. 그곳이 허물어지고 있다. 갑자기 낯설다는 느낌을 받는다. 왠지 기억이 사라지는 느낌이랄까. 친구들과 걸어 다녔던 골목들이 떠오른다.

 

완전히 철거되어 사라지기 전 한번쯤 마지막 모습을 바라보고 싶었다. 기억이란 이름으로 저장된 순간을 되새기기 위해 아직 정리되지 않은 곳에 걸어 들어간다. 사람들은 모두 이주를 끝낸 후였고 아직 대체되기 전의 마지막 기억이 남아있다. 더위에 지쳐가는 날 천천히 걷는다. 그동안 있던 것들이 사라져버리는 것. 하나하나 소중하게 돌아다본다.

 

내가 본 풍경. 구겨진 간판들, 미용실과 사진관, 수제화 가게, 목욕탕, 주점들, 집들, 가족들, 고양이들, 이끼들, 그 이끼마저 무너지는 중이다. 바벨처럼 두려워진다. 곧 있을 무너짐을 알려주듯 유리창은 깨져 있고 벽돌들은 간간히 빠져있다. 늘어진 전선은 힘에 부치는 듯 아래로 길게 포물선을 내리고 있다. 예상대로 이주가 끝난 곳은 황폐했다. 이 황폐함 속에서 기억은 어떻게 이어져야할까? 주거지는 바뀌어도 삶은 이어지는 것이기에 새로운 삶의 장소로 탈바꿈하겠지만 그동안 이 공간이 가졌던 각자의 이야기들은 어떻게 기억되고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인지 궁금해진다.

 

소멸이 진행 중인 공간속에서 자본은 새로운 건축물을 생산해 낼 것이다. 역사가 재생되듯 시간과 공간은 많은 것들을 허물어뜨리고 그 자리에 다른 것들을 세우며 삶을 이어왔다. 새롭게 들어서는 구조물들은 존재했던 것들을 소멸시키며 거대하게 탄생할 것은 분명하다. 문명은 그렇게 존재를 드러낸다. 그 사이 여백이 있었다. 눈을 감으니 바라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이어져 온 것과 새로 만들어질 것 사이 여백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이번 여름은 다른 해보다 무척 더웠다. 환경의 변화에 대해 많은 동식물들의 멸종을 이야기하는 기사들도 많아졌다. 나도 멸종을 생각한다. 기억의 멸종. 오래된 것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 스스로 잃어버린 시간과 공간이라는 추억, 기억으로만 남아야하는 상실. 점점 높아지기만 하는 건물들을 보면서 더 이상 올려다볼 수 없는 현실을 생각해낸다. 주변의 것들이 높아지는 곳에서 점점 우리들의 기억은 낮게만 흘러가고 있다. 우리는 지나온 시간을 찢으며 자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해가 지면 거리에서 깊숙이 박힌 뼈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힘줄들은 녹슬어 끊임없이 날갯짓을 한다. 이끼의 뿌리가 감정을 드러내자 나무를 무너뜨리며 달려 나간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건물의 氣道를 보게 된다. 조개무지를 밟고 서성이는 길고양이들이 訃告를 작성한다.

 

()를 쓰며 허물어지는 삶을 대체할 준비를 한다. 그동안의 기억들은 몸속에 멍울을 남겨둔다. 아직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보다 남아있던 것들에 대한 연민이 많다. 철거가 시작되고 기억은 기억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무너지는 것 사이에서 욕망의 뿌리들이 굳건해진다. 거듭 허물어지는 기억, 우리는 기억의 멸종을 따라간다. 우리는 거듭 사라지는 기억 속에서 스스로 역습당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 새로운 거에 익숙한 건 아닌가 싶다. 비슷한 구조의 아파트 단지나 주상 복합 단지들이 계속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기존에 있던 것들은 시간과 공간의 결합으로 오래도록 이어온 것이다. 계속해서 이어져 온 삶의 공간들도 충분히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그 의미와 가치를 너무 단순화하고 자본의 논리에 익숙해져서 삶의 의미를 한쪽으로 치우쳐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다. 도시라는 공간은 다양성을 가진 공간이다.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환경들 속에서 분열되기도 하고 융화되기도 한다. 과연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철거가 시작된 곳에서 다시 생각해 본다.

 

다시 세워질 것은 소리를 내고 있다. 그것은 웃음일까, 울음일까.